[소설]구름모자 벗기 게임(71)

  • 입력 1998년 10월 11일 20시 11분


제3장 나에게 생긴 일⑭

생이 처음 시작될 때 나는 세상과 상관없이 그토록 순결한 꿈을 꾸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신화였던가. 전부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던, 오직 하나의 이념만을 가졌던 것이 나의 잘못이었던가. 그 속에서라면 60도의 고열도, 뜨겁고 건조한 모래 바람도, 1백20일 간의 부재도 견딜 수 있다고 믿었는데, 가난과 결핍과 일에 치여 사는 남편의 외박까지도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작은 시련이라고 믿었을 뿐 단 한번도 의심한 적 없이 받아들였는데….

분명한 것은 그때는 지금보다 더한 최악이었다는 점이었다. 내가 원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내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내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지 분명히 해야 할 때였다. 나로선 남편에게 돌아가 해결해야 할 문제 같은 건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 예의를 지키면서 떠나는 것 밖에는…. 그리고 게임은 끝났다.

―난 당신을 만났을 때 이미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있었어요. 당신은 잘못한 거 없어요. 그리고 난 생각보다 강해요.

―… 당신은 그렇게 강하지가 않아. 강하다면, 당신은 부서지지 않았을 거야. 이런 게임도 하지 않았고. 하지만 이제부턴 강해지기를 바래. 강하다는 건 이를 악물고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도 행복하다는 거야. 아무 곳에도 뿌리 내리지 않고 진흙 한 점 묻히지 않고 피어나는 물 위의 꽃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런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당신은 가짜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분명 진지하고 기묘한 사람이에요.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이 길 끝까지.

―그래요….

변한 것은 없었다. 다만 그 끝이 더욱 명백해진 것 뿐이었다. 순간의 시차로 계곡길을 빠져나왔던 그 순간에 나는 이미 벽을 지나온 것이었다. 우리는 이 길 끝까지 갈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되돌아오지말았으면….

호텔의 특실은 넓고 가구들은 커다랗고 무거워 보였으며 카펫과 커튼은 두꺼웠고 칼칼한 먼지 냄새가 났다. 화장대 위에는 옅은 주홍색 글라디올라스가 세 줄기 꽂혀 있었다. 나의 상처 때문에 방안에서 저녁을 시켜 먹었다. 글라디올라스와 텔레비전에서 보내주는 클래식 연주 프로그램이 위안이 되어주었다. ‘라 캄파넬라’가 피아노로 연주되고 있었다. 웨이터가 그릇들을 내간 뒤에 그가 나를 씻겨 주겠다고 했다.

그러자 첫날 ‘초원의 빛’이라는 모텔에서 그가 내 몸을 보여달라고 했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방안에서 옷을 하나씩 벗었다. 무릎의 상처와 온 몸의 멍자국들이 하나 하나 드러났다. 마지막 옷을 벗었을 때 나는 팔을 날개처럼 들어올리며 말했다.

―말해 보세요. 내 몸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규는 담담하게 내 몸을 바라보더니, 상처를 누르게 될까봐 염려하며 가볍게 끌어안고 등을 쓸어주었다.

―이것이 당신 몸에 기록된 나인가….

무력하고 회한이 가득한 음성…. 그는 내 몸에 이불을 감아 침대에 앉혔다.

―목욕하기엔 너무 아플 것 같다. 조금만 기다려. 약부터 구해와야겠다.

―어디 가려구요?

―마을에 가면 작은 약국이 있을 거야.

규는 나의 얼굴을 바로 잡아 정면으로 바라본 뒤 텔레비전을 켜놓고 나갔다.

<글:전경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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