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탠더드시대 31/연봉제]일한만큼 주고 받는다

  • 입력 1998년 9월 22일 19시 04분


미국 월트디즈니 한국지사의 박운서(朴雲緖)이사는 미국의 한 투자자문회사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미국에서도 대학 졸업시즌이 되면 회사 인사관계자들이 직접 학교를 찾아와 학생회관에서 졸업반 학생들을 상대로 면접을 실시합니다. 우리와 다른 것은 면접과정에 연봉 협상이 들어있다는 점이죠. 같이 입사해도 연봉은 제각각이고요. 입사 후엔 연봉교섭을 매년 새로 합니다. 합의가 이뤄지지 않거나 다른 회사로부터 더 좋은 제의를 받아 직장을 옮기는 경우도 흔합니다.”

물론 미국이라고 해서 모든 근로자에 연봉제가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노동량을 시간으로 계산할 수 있는 블루 칼라(생산직 육체노동자)는 몇 시간 일했는지를 따져 시급제(時給制)로 봉급을 받는다. 연봉제는 노동의 양이 아니라 질이 중시되는 화이트 칼라에 주로 적용되는 임금제도.

유럽은 미국보다는 출신학교나 자격증이 중시되는 사회지만 전체적으로 성과를 우선시하는 연봉제가 정착돼 있다.

연공서열이 중시돼온 일본에서는 이미 69년 가전업체인 소니사가 파격적으로 연봉제를 도입한 선례가 있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구조조정 노력이 한창인 최근엔 연봉제를 도입한 기업이 부쩍 늘어났다. 특히 미쓰이물산 마쓰시타전기 후지쓰 등 오랜 연공서열 전통을 가진 기업들이 연달아 소니식 연봉제를 도입키로 결정, 충격을 줬다.

일본 중앙노동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말까지 연봉제를 도입한 일본기업은 전체의 18.5%. 올해안에 연봉제 도입의사를 밝힌 기업까지 합치면 28.4%에 이른다.

우리나라도 과거 일본처럼 샐러리맨이 큰 실수를 하지 않는 한 평생 같은 직장을 다녔다. 입사 때 학력에 따라 초봉이 결정되고 입사 이후 근속년수에 따라 자동적으로 임금이 오르고 승급 승진이 됐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 이후 해고태풍 속에 살고 있는 요즘, 평생직장은 훌쩍 날아가버렸다. 평생직장과 연공급제의 자리엔 어느새 정리해고와 연봉제가 대신 들어앉았다.

한국경영자총협회 부설 노동경제연구원 양병무(梁炳武)부원장의 경험. “92년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 연봉제를 주장하고 다니자 많은 사람들이 ‘미친 놈’이라고 하더군요. 94년 ‘세계화’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리고 두산그룹이 30대그룹 중 처음으로 연봉제를 도입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연봉제는 본격적인 찬반논쟁의 단계에 접어들었지요. 이제 연봉제를 도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따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들 어떻게 도입할 지를 물을 뿐이지요.”

최근 국내 기업 사이에 연봉제 확산속도는 일본보다 빠르다. 올들어 5대그룹중 삼성그룹이 전 계열사에서 차장급 이상에 대해 연봉제를 도입했다. 대우그룹과 SK그룹도 일부 계열사에 연봉제를 도입한데 이어 전 계열사로 확대할 예정이다.

삼성그룹 박영세(朴永世)이사는 “요즘 사무실에 들어서면 직원들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증권가에서도 지난해 동원증권이 처음 연봉제를 도입했다. 이어 삼성 보람 한화 대우 현대 쌍용 한양 일은증권 등이 연봉제를 도입했거나 도입을 추진중이다. 은행권에서도 내년부터 3급이상부터 연봉제가 도입될 전망. 최근 합병을 선언한 상업과 한일, 하나와 보람, 국민과 장기신용은행들이 선두주자로 나서고 있다.

정부에서도 내년부터 국장급 이상 공무원에 대해, 2000년부터는 전체 공무원에 대해 연봉제를 적용할 계획이다.

연봉제의 도입은 단순한 임금제도의 변화가 아니다. 연봉제로 인해 ‘소수의 정예’는 전보다 높은 임금을 받게 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임금이 깎이는 고통을 겪게 된다.

동원증권의 이병철(李柄哲)인사팀장은 “지난해 연봉제 시행으로 억대 연봉을 받는 직원이 10여명이 나왔는가 하면 그 전보다 월급이 깍인 직원도 전체 직원의 10%가량에 이른다”고 전했다.

평생직장에 기반을 둔 회사문화도 연봉제 도입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연봉순이 경력순 학력순을 대체하면서 선후배나 동기관계가 희미해지는가 하면 직원들이 높은 연봉을 쫓아 정든 회사를 쉽게 떠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선한승(宣翰承)연구조정실장은 이에 대해 “일견 사회가 점점 더 인간미와 안정성을 상실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더욱 생산적인 사회로 가기 위한 불가피한 변화”라고 풀이했다.

기업현장에서도 과연 그럴까. 두산그룹 전략기획본부 황인신(黃仁新)부장의 설명을 들어본다.

“3년 넘게 연봉제를 시행해오면서 직원들 스스로 자기계발에 힘쓰는 모습을 보게됩니다. 누구나 경쟁에 노출될 때 비로소 경쟁력을 얻는다는 믿음을 갖게 됐습니다.”

〈송평인기자〉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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