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봉순이 언니(54)

  • 입력 1998년 6월 26일 19시 11분


꽃밭에서 아무 것도 모르는 척 담을 따라 시든 나팔꽃의 꽃씨를 받던 나는 그만 더 참을 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사실은 내가 운다해도 아무도 나를 눈여겨보지 않겠지만, 나는 큰소리로 울어서는 안된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봉순이 언니가 어머니에게 행하는 집요한 저항의 몸짓을 뒤통수로 느끼면서 까만 씨를 받아내 원피스의 앞주머니에 넣었다. 통통하던 나팔꽃 이파리와 꽃잎들은 이제 말라버렸다. 하지만 이 눈동자처럼 검은 씨앗이 내년 봄에는 다시 담장따라 피어나리라. 아침마다 이슬을 머금은 그 황홀한 보라빛. 열세개, 열네개, 열 다섯개…. 봉순이 언니의 울부짖는 소리, 내 눈에서도 자꾸 눈물이 솟고 있었다. 나는 흰 블록담을 따라 내 몸을 더 작게 붙였다.

―안가요! 안간다니까!

―글쎄 갑자기 또 웬 고집이니? 아침까지는 그러겠다고 하더니, 이것아, 동네 창피한 줄 알아야지, 웬 소리를 지르는 거야, 지르길!

나는 꽃밭에 서서 계속 울었다. 언니가 하지 않으려하고 어머니가 하게 하려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상황인지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어렴풋한 느낌은 있었고, 설사 그것이 어떤 상황이 되었든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승강이를 들으며 아마 산다는 게, 아마도 힘겹고 슬프고, 등불 하나 없이, 먼 먼 들판을 걸어가는 일 같다는 걸, 누구나 헨젤과 그레텔보다 험하고 처량하게 숲속을 헤매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것을 나는 봉순이 언니의 울음소리를 통해 미리, 내 인생의 낮은 배경음을 듣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헨젤과 그레텔은 뭐하러 집으로 돌아왔을까, 마녀를 죽이고 빼앗은 보물을 가지고 숲속에서 그냥 오순도순 살지. 뭐하러 그 악독한 새어미와 줏대없는 아비가 사는 집으로 돌아왔을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그렇게 울부짖으면서도, 어머니보다 더 살이 찌고 힘이 센 봉순이 언니는 어머니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대문가에 당도했다. 어머니가 대문가에 봉순이 언니를 세워 놓았고 이어서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너 여기까지는 끌고 왔다만, 나도 더는 못하겠다. 어떻게 할래? 갈래 말래? 간다면 모든 걸 책임져주겠지만 가지 않겠다면 좋다! 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대신 나와는 이제 끝이고, 그리고 당장 우리집에서 나가거라. 자 어서 말해라. 가겠니? 말겠니?

어머니는 단호했다. 이제 대문을 밀고 골목으로 나가면 마주치게 될 동네사람들의 이목도 생각해야 했을 것이다. 싫다고 몸부림치며 어머니에게 거의 끌려나가던 봉순이 언니의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어서 말을 하라니까!

순간 봉순이 언니의 얼굴이 실룩거리더니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글:공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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