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이상국 시집 「집은 아직 따뜻하다」

  • 입력 1998년 6월 25일 19시 44분


‘강원도 양양에 가면 설악산과 이상국을 만난다….’

그 이상국씨(52)가 네번째 시집을 냈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창작과비평사).

강가에 홀로 선 미루나무, 그 물그늘에 지난 시간이 거슬러 올라오듯 빛바랜 풍경들이 하나 둘씩 어린다. 근대화 과정에서 뒷전으로 밀린 이발소 그림 같은 시골의 정경(情景). 깊은 시름과 울혈(鬱血)에 잠겨 있다.

시집을 들추고 있자니, 자꾸 옛날 생각이 난다.

마분지처럼 낡아 바람에 미어질 것 같은 ‘박정희 때 이은 슬레이트 지붕’도 생각나고,면체육대회에서 하늘 높이 똥볼을 차올려 박수받던 ‘황소같은 돈복이 아버지’도 생각나고, 물가에 나와 엉덩짝에 풀물을 들이거나 물수제비를 띄우던 ‘연어처럼 등때기 푸른 아이들’도 생각나고….

줄곧 양양의 논밭고랑을 지켜온 시인.

아침 저녁 연기 올리던 삶이 빠져나가버린, 이백년 삼백년 묵은 구들장이 식어버린, 텅 빈 농가를 바라보며 그는 묻는다. ‘저 왕조의 엄청난 무게도 버텨왔던 대들보가/왜 우리들의 세상에 와 무너지는지’를.

하지만 시는 어떤 경우에도 침묵(沈默)이란 심연과 늪 속에 가라앉는가.

시인은 분노로 들끓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서 회한을 삭인다.목소리를 높여 현실을 겨누기 보다는 서정 속에 여과된 심상(心象)을 통해 가만히 현실을 비춘다.

그의 마음 한 구석에선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벌레처럼 잠들’고 싶은 욕망이 깃들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고단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그의 노래. 고향을 버려두고 도시로 나와, 그 도시에서마저도 버림받은 우리 시대의 고달픈 삶, 그 어쩌지 못하는 쓰린 허기(虛飢)까지도 쓰다듬는다.

‘국수가 먹고 싶다/…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어느 곳에선가/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마을의 문들은 닫히고/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눈물자국 때문에/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이기우기자〉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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