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재홍/6·25와 남북적대감

  • 입력 1998년 6월 25일 19시 17분


6·25기념일 하루전 군부대를 시찰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대북 햇볕정책을 재천명했다. 정부가 남북대화를 강조하다가도 이맘때쯤이면 강경발언을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상례였다. 더구나 북한이 침투시킨 잠수정까지 발견된 마당이다.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평상시보다 높아질 수 있는 요인이 겹친 시점에 나온 ‘유화정책 불변’ 방침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올해로 동족상잔의 전쟁이 발발한지 48년, 휴전된지 45년이 흘렀다. 많은 사람이 전쟁의 참상을 잊어가고 있는 것도 세월 탓일 것이다. 그러나 참전용사와 전사상자, 실종자 가족들의 기억은 남달리 생생하다. 그래서 6·25는 지나간 역사이면서 살아있는 현실이다. 남북관계에서 가장 치우기 어려운 걸림돌인 적대감의 뿌리도 이 전쟁에서 비롯됐다.

▼북한 내부를 보면 적대감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바로 6·25전사자 유자녀들이 김일성(金日成)의 ‘양자그룹’으로 키워진 실세들이기 때문이다. 6·25당시 북한군 전선사령관 김책(金策)의 아들 김국태(金國泰·당간부부장), 2군단장 최현(崔賢)의 아들 최용해(崔龍海·사로청위원장), 군총참모장 강건(姜健)의 아들 강창주(姜昌柱·군단장) 등 만경대혁명학원 출신이 그들이다.

▼6·25전쟁으로 남한에서 2백만명이 숨지고 산업시설 43%, 주택 33%가 파괴됐다.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모두 2백50만명으로 추산된다. 적대감 청산없이는 남북관계의 전환이 어렵다. 6·25에 대한 역사 재조명을 통해서 잘못 잉태된 적개심의 해소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그것만이 동족간 전쟁으로 입은 소모를 만회하는 길이다. 본사가 2000년 이날 남북심포지엄을 추진하는 것도 그런 점에서 의미가 크다.

김재홍<논설위원〉nieman9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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