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총리서리의 장관 제청

  • 입력 1998년 4월 29일 19시 40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김종필(金鍾泌)국무총리서리의 제청으로 새 보건복지부장관을 임명한 것은 잘한 일로 보기 어렵다. 그러잖아도 총리서리체제의 합헌 여부가 헌법소원에 걸려 있고 그에 대한 정치권과 학계의 의견도 양분돼 있다. 그런 마당에 김총리서리가 장관을 제청한 것은 헌법, 또는 적어도 합헌 여부의 논쟁을 우습게 여긴 독선적 처사다.

정부는 총리서리체제가 합헌이므로 김총리서리의 장관제청에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김총리서리가 장관을 제청하지 않으면 총리서리체제의 위헌성을 스스로 인정하는 결과가 되지 않겠느냐고도 말한다. 그러나 위헌 여부를 헌법재판소에서 따지고 있는 때에 정부가 일방적으로 합헌을 주장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헌재(憲裁)의 권위와 권력분립의 원칙을 훼손하는 일이다.

지난 2월 김대통령이 김영삼(金泳三)정부 마지막 총리인 고건(高建)씨의 제청형식을 빌려 첫 내각을 구성했던 것은 총리서리의 제청에 위헌시비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대통령은 내각구성과 함께 고씨를 총리에서 물러나게 하고 김종필씨를 총리서리로 지명했다. 잇따라 불거진 재산관계 의혹에도 불구하고 전임 복지부장관 주양자(朱良子)씨를 쉽게 경질하지 못한 배경의 하나도 후임자 제청의 어려움에 있었던 것으로 안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김총리서리의 장관 제청을 강행한 것은 도발적이라는 인상을 씻기 어렵다.

총리서리가 장관을 제청한 전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노태우(盧泰愚)정부까지만 해도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야당의 거듭된 위헌주장에 따라 김영삼정부 들어 그런 일이 없어졌고 그때의 야당이 이제는 집권세력이 됐다. 그런 집권세력이 태도를 이렇게 바꾼 것은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이다. 김총리서리의 장관제청이 잘못이라면 그가 행하고 있는 다른 국정행위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있다. 이 문제 역시 총리서리체제의 합헌 여부와 함께 헌재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므로 결과를 기다려 보면 된다.

한마디로 헌법소원이나 국회의 총리인준 여부가 매듭지어질 때까지 장관을 임명하지 않고 차관이 장관을 대행하도록 해도 될 일이었다. 복지부장관이 한두달 없다고 해서 국정이 마비되는 것도 아니다. 헌법의 존엄성은 장관 한 자리의 공백 해소보다 훨씬 중요하다. 현실적으로도 새 장관은 야당의 거부로 국회에도 나가지 못하는 등 업무수행에 제약을 받을 것이다. 정계개편이다 뭐다 해서 가뜩이나 시끄러운 여야의 공방은 이번 일로 더욱 격렬해지고 있다. 김총리서리의 장관제청은 성급했다. 정부는 법을 무겁게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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