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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1998년 2월 26일 08시 3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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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살짝 문을 열고 들어선 대웅전. 살며시 무릎 꿇어 앉으니 바로 앞에 자줏빛 가사의 두 비구니. 뒷모습이 처연해 보임은 착잡한 내맘 탓일까.
벌써 두달이 흘렀다.
미친듯 일해온 13년. 회사(고려증권)가 쓰러지고 곧이어 차장급이상 전원 사직서 제출. 그날 저녁 경영기획팀 차장인 나 서기석(42)을 포함한 몇몇은 일산의 한 포장마차에서 강소주를 마셨지. 어색한 침묵, 쓴 웃음들. ‘1분간만 엉엉 울자’고 누군가 말했을 때 휑한 웃음이 잠깐 지나고 이내 한바탕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마흔을 갓 넘자마자 갑자기 당한 황당한 실직. 그날, 우리는 사는게 너무 힘들고 허전하고 쓸쓸하고 황막해서…… 울었다.
불교신자는 아니지만 그저 단 몇분만이라도 부처님 앞에서 무념무상하리라 했는데 끊임없는 상념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실직후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미워했던가. 그러나 미워할수록 고통의 나락으로 치닫는 내 모습. 정신을 차리자. 정말 나는 단지 피해자일 뿐일까. YS에 표를 던지지 않았던가. 스스로 생각해도 쓴웃음이 나온다. 회사에선 어땠나. 경영기획팀 차장이라는 핵심파트에 있으면서 사장과 고등학교 선후배사이로 묶여 독대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왜 그때 직언 한마디 제대로 못했을까. 그저 좋은게 좋은거라고, 윗사람 눈치보기나 바빴지, 부끄럽다.
서둘러 짐을 꾸려 안면도로 향한다.
구불구불 1차로 도로를 1시간여 달리니 빨간색 다리가 나타난다. 안면도를 육지와 이어주는 연륙교다. 섬 입구에서부터 끝없이 펼쳐지는 푸른 소나무밭. 찬바람도 아랑곳없이 하늘로 죽죽 뻗은 송림이 장관이다. 내친 김에 최남단 영목까지 차를 몰았다. 아늑하고 조그만 포구. 94년에 신입사원들과 이곳에 왔었다. 여직원을 업고 벌쓴 사진을 아내에게 들켜 얼마나 바가지를 긁혔던가. 아, 다시 돌아오지 못할 그 시절 시절들.
안면도를 나오며 이름이 예쁜 꽃지해수욕장에 들렀다.
사람드문 겨울바다. 심호흡…. 크게 한번 기지개를 켜본다. 보고 싶다. 마누라 딸 아들. 실직후 되찾은 소중한 우리 가족. 며칠전 비오는 날엔 우산 가지고 초등학교 딸아이 마중을 갔었다. 손 꼭 잡고 우산속에서 도란도란, 우리 부녀는 처음 그렇게 긴 얘기를 했다. 직장 다닐땐 아이들 자는 얼굴도 보기 어려웠는데 요즘엔 매일 저녁 함께 기도를 한다. 그저 오늘도 우리 가족이 즐겁게 보내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내용. 다시 ‘직장’을 갖더라도 일 핑계대고 그들 여린 가슴에 상처주지 않으리.
바닷가에서 굴을 따다 구워 파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실직한 막내아들 걱정에 잠못 이룰 고향의 노모얼굴이 겹쳐진다. 17세에 시집와 하루도 쉬지않고 굴을 딴다는 한 할머니는 ‘오늘은 손자 과자값이라도 벌어 다행’이라며 환한 표정이다. 굴값 1만원에 고마워 어쩔줄 모른다. 소녀 같다. 소유란 무엇인가. 남보다 더 많이 갖기 위해 미친듯 뛰는 우리네 삶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쉬면서 마음을 대청소하리. 허망 분노 욕심 슬픔, 이 모든 것들을 다 쓸어버리리. 앞으로 붕어빵을 구워 팔더라도 그 모든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정신적 힘을 가져야 한다. 남은 시간은 아직 많다. 내 삶의 결론은 지금이 아니라 무덤에 묻히는 바로 그날.
세상의 모든 실직자들이여, 파이팅! 파이팅!
〈예산 태안 동행취재〓허문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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