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이인길/「소비의 경제학」

  • 입력 1998년 2월 22일 21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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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마다 점포마다 세일광고가 넘쳐난다. ‘가격파괴’니 ‘왕창세일’ ‘폭탄세일’이니 하는 말은 이미 흘러간 ‘곡조’다. 보통이 50∼60%이고 좀 더한 곳은 90%, 심지어는 ‘무가격’ 세일도 예사다. 그래도 손님이 없고 물건이 안팔린다. 상인들이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거리의 또 한편에선 절약을 강조하는 소비억제 캠페인이 요란하다. 시민단체가 주관하는 ‘아나바다’ 장터에 수천명의 주부가 몰리고 구청과 학교, PC통신에서도 현대판 ‘자린고비’운동이 한창이다. 상인들의 비명과 소비억제 캠페인. 대조적인 거리의 두 풍경을 보면서 뭐랄까 한국 사회 특유의 ‘소비의식’ 같은 것을 느낀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우리에겐 소비 하면 사치와 낭비를 연상하고 적대시하는 경향이 있다. 툭하면 과소비가 사회적 공분의 대상이 되고 수입품을 무조건 배격하려는 분위기도 이와 무관치 않다. 소비의 미덕은 ‘물건을 헤프게 써서는 안된다’는 이 한마디에 압축되어 있다. 그 결과 부자든 가난뱅이든 소비에서만은 평등해야 직성이 풀리고 고급소비는 모두가 사치요 악덕으로 단죄하는 심리가 사회 저변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소비에 대해‘증오심’을키우는 이런 유의 소비철학은 이제 냉정히 따져볼 때가 됐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물질적 풍요는 가장 강력한 행동동기다. 경제가 발전하고 기초적 의식주 생활이 충족되면 사람은 그 다음 단계로 문화적 욕구를 소비라는 형태로 표현한다. 패션 같은 것도 따지고 보면 소비행위를 통해 삶을 풍족하게 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단지 유행이나 가격의 높고 낮음만으로 소비행태를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약 부자들의 소비는 모두 과소비이고 대형 냉장고와 대형 승용차가 팔리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예를 들어보자. 이를테면 어떤부자가오늘부터소비를 과감하게 줄이기로 했다고 치자.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식과 이발소 가는 것도 포기했다. 주말에 즐기는 골프와 테니스는 등산으로 대체했다. 소비를 줄였으니 호주머니엔 돈이 가득하고 분명히 그의 저축은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어떤가. 자동차업체나 이발관 주인, 식당경영자와 종업원, 골프장 종사자의 소득은 어떻게 될까. 보나마나 이들의 소득은 그가 늘린 저축액만큼 줄어든다. 소득이 줄면 이들의 저축도 당연히 줄 것이다. 자동차회사도 꼭 같은 과정을 밟는다. 투자가 축소되면서 일자리와 소득을 동시에 잃은 사람들은 소비를 하려야 할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되는데 요즘의 우리 경제가 이와 유사하다.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교육과 의료행위,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열렬히 염원하면서도 우리는 스키를 사치성 스포츠로 매도한다. 휴일에 스키장 가는 것을 국제통화기금(IMF)시대에 해서는 안되는 일로, 그러면서 계층간 위화감 운운 하는 나라. 여기에 대한 대가(代價), 다시 말해 우리가 지불하는 사회적 비용은 막심하다. 스키에서 금메달은커녕 레저와 위락시설의 수준이 아시아에서 맨 꼴찌로 전락했다. 교육과 의료도 싼 값의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지 않은가. 소비행위는 생산과 더불어 자본주의의 양대 축이다. 요즘 TV에 나와 소비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개그우먼 이경실의 말처럼 소비자가 똑똑하고 현명해야 경제도 강해진다. 이인길<정보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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