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이낙연/DJ의 逆說

  • 입력 1998년 2월 18일 21시 10분


정치에도 역설(逆說)이 많다. 대개는 이유있는 역설이다. 때로 지도자들이 평소 노선과 배치되는 정책을 펴는 것도 그에 속한다. 1880년대에 노동자재해보험법 질병보험법 고령연금법을 처음으로 제정한 사람은 독일의 보수적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1911년에 최초의 실업보험제도를 정비한 사람은 영국 보수당 내각의 내무장관 윈스턴 처칠이었다. 1933년에 취임한 미국 민주당 출신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최저임금제 최장노동시간제 등을 도입, 사회복지를 확충했으나 그가 맨 먼저 제정한 것은 사업가와 은행가들을 안심시키는 보수적 법률들이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적 조건 때문이었다. 비스마르크는 세력을 확대하는 혁명적 노선의 사회민주당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처칠은 광부와 철도원 파업으로 야기된 광범한 노동불안시기에 내무장관으로 일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의 와중에 취임했다. 이들은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체제를 그런 정책으로 구했다. 미래의 세계는 ‘20 대 80의 사회’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 지 오래다. 기술발전과 무한경쟁, 그리고 광속(光速)으로 국경을 넘나드는 거대 금융자본의 탐욕으로 인류의 20%는 유복해지고 80%는 불행해지리라는 얘기다. 비슷한 일은 한 사회 내부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적 시장경제질서의 수용을 요구한다. 그런 IMF체제는 우리에게도 ‘20 대 80의 사회’를 앞당겨 놓을지 모른다. 시장경제는 ‘결과의 불평등’을 낳는다. 멕시코는 IMF체제를 성공적으로 극복했으나 70%의 국민은 IMF개혁 이후 가난해졌다. IMF개혁이 ‘선의의 피해자’를 내면서 사회적 상처를 남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는 개혁 이외의 대안이 없다. IMF개혁으로 미증유의 대량실업이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실업자 사이에서도 빈익빈(貧益貧)이 생기게 됐다. 실업수당 지급대상이 늘었지만 그래도 실업자의 절반에 훨씬 못 미친다. 실업자가 아니더라도 중산층이 이미 붕괴조짐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일부 부유층은 고금리의 혜택을 누린다. 부유층의 음성자금을 끌어내기 위해 우리는 어렵게 정착시켜 온 금융실명제마저 사실상 포기했다. 중산층 및 서민에 대한 배려와 경제정의를 중시해온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이 평소에 그런 사회를 꿈꾸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혹독하다. IMF체제는 그의 선택폭을 좁혀 평소의 구상과 어긋나는 정책도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에게 짐지워진 역설이다. 이것은 아직까지 그의 책임이 아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자들의 불만은 그를 겨냥할 것이다. 김차기대통령은 각 분야가 IMF개혁을 흔쾌히 수행토록 계속 독려, 유도해야 한다. 개혁은 자발적으로 해도 쉽지 않다. 하물며 정치권과 재벌들처럼 마지못해 하는 개혁시늉은 피곤하고 성공가능성도 더 낮다. “다른 동유럽 국가에는 활기가 있지만 구(구)동독은 그렇지 않다. 다른 국가들은 개혁을 하지만 구동독은 (구서독에 의해) 개혁을 당하기 때문이다”는 구동독 마지막 총리 드 메지에르의 고백은 음미할 만하다. 아울러 김차기대통령은 평소 구상을 중장기 정책으로 다듬어 적절한 시기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정책은 IMF체제를 극복한 이후 ‘IMF상처’를 치료해 가면서 실행에 옮길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꿈꾸었을 사회는 집권후반기부터나 조금씩 구현되기 시작할는지 모른다. 이낙연(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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