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이인길/과학계 「잃어버린 10년」

입력 1998-02-02 19:39수정 2009-09-25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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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인들의 눈에 비친 역대 대통령의 모습을 보면 여러모로 흥미롭다. 먼저 박정희대통령. 분명한 현실인식과 강력한 리더십이 특징. 직접 챙기는 스타일로 과학 불모지에서 국가경영과 경제 발전의 토대를 닦았다. 세계 최고의 벨연구소를 모델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설립하는 등 선견지명을 가진 대통령으로 점수가 높다. 전두환대통령은 리더십에선 박대통령을 닮았지만 스타일은 많이 달랐다. 부정적 이미지와는 달리 과학기술에 대해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기회있을 때마다 관심을 표시했다. 때론 이것이 지나쳐 해프닝도 많았다. 체신부에서 광섬유에 대한 브리핑을 받다가 느닷없이 “광섬유도 염색을 잘 해야 부가가치가 높아진다”고 코멘트해 폭소가 터진 것은 유명한 얘기. 웃음의 의미를 본인이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정치적 평가야 어떻든 두 사람은 나름대로 과학기술 분야에 기여한 대통령으로 과학계에선 기억한다. 그렇다면 노태우 김영삼 두 대통령은 어떨까. 한마디로 제스처는 요란했지만 실상은 ‘무관심과 안일’로 일관했다고 혹평한다. 노대통령은 취임초기 팔을 걷어붙이며 과학기술분야에 의욕을 보였지만 역부족이었고 김대통령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 예로 문민정부 5년간 국가적 과제 도출과 정책 조율을 목적으로 신설한 과학기술장관회의가 단 두번 열린 것이 이를 잘 말해준다. 과학기술에 관한한 인상에 남는 것이 별로 없는 두 대통령. 그래서 과학계에선 이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아쉬워한다. 과학기술이 물론 마음먹는다고 금방 될 일도, 대통령 한 사람의 의욕만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다. 그러나 통치자가 기술패권의 향방을 진지하게 살피고 한국경제의 속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 보았다면 ‘10년의 세월’을 그렇게 한가롭게 보낼 수는 도저히 없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명색이 한국경제의 간판산업이라고 하는 반도체를 보자. 요소기술의 경쟁력에서 제조기술만 선진기업 수준과 대등할 뿐 시스템과 설계는 70%, 화합물 신소자 마이콤설계에선 기술자립도가 30%도 채 안된다. 미래형 산업인 컴퓨터기술은 더 한심하다. 기업마다 독창적인 제품처럼 선전이 요란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웃기는 일이다. 몸체 하나에 껍데기와 부품 얼마정도가 국산일 뿐 죄다 수입품 조립이고 로열티 기술이다. 다른 품목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이게 한국 과학 산업기술의 현주소다. 종합적인 과학기술력에서 한국이 선진권의 30%가 채 안되고 20위권 밖의 2류국가로 밀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과학기술이 방향성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그중의 하나가 현장과 동떨어진 공허한 기술교육이다. 독일 국력의 상징인 마이스터(장인)처럼 중간기술자를 길러내는 시스템이 우리에겐 전혀 없다. 대학의 공학교육도 학문과 이론쪽에만 치우쳐 현장의 요구가 무시된다. 자연계 대졸자의 제조업 취업률이 20%가 채 안되는 것도 바로 이때문. 여기에 기초과학의 육성, 과학 기술 예산과 권한의 배분, 연구소 위상의 정립, 산학연의 연계문제 등이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것을 제대로 풀려면 과학의 대중화 생활화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새 정부가 먼저 가슴에 새겨야 할 점은 국민적 애정과 관심을 북돋우는 일이다. 스포츠에서 박찬호가 국민적 영웅이 되고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억대의 포상금을 지급하는 것을 잘못됐다곤 할 수 없다. 그러나 과학올림피아드에서 1등하는 학생이 시선조차 끌지 못하고 컴퓨터 괴짜를 ‘문제아’로 치부하는 사회에 과연 미래가 있을까. 김대중차기대통령은 과학 기술현장을 많이 돌아다니기를 권하며 학생들의 프라이드를 살려주는 이것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해주기 바란다. 이인길 (정보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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