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비리에 연루된 정치인과 전현직 고위공직자들에 대한 검찰의 소환수사가 오늘부터 본격화할 전망이다. 설 연휴동안 소환대상자 선별(選別)작업을 벌인 검찰이 과연 몇 명이나 불러 조사할지, 또 얼마나 정확히 사건의 진상을 밝혀낼지 모두 눈여겨 지켜보고 있다. 특혜대출 외압(外壓)의 실체를 벗기는 게 수사의 본질이겠으나 한보로부터 누가 어떤 명목의 돈을 얼마나 받았고 그걸 어디에 썼느냐도 국민들에겐 큰 관심거리다.
검찰의 정치권인사 소환 1순위로는 한보 돈을 받았음이 기정사실화된 신한국당 洪仁吉(홍인길) 국민회의 權魯甲(권노갑)의원이 꼽힌다. 홍의원은 『나는 여권(與圈)에서 깃털에 불과하다』며 돈 받은 사실을 부인했고 권의원은 억대의 돈을 받았음을 실토하면서도 『떡값일 뿐 대가성(代價性)있는 돈이 아니었다』고 강변했다. 많은 사람들은 정치인 소환조사에서 이런 식의 어이없는 말들이 쏟아질 것을 우려한다. 정치자금이나 떡값 명목이라면 정치인들이 무슨 돈을 받아도 처벌할 수 없게 돼 있는 현행 정치자금법 조항 때문이다.
억대의 떡값이라는 것이 서민 정서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지만 정치인들만은 예외다. 대가 약속없이 받았다면 정치자금으로 간주된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는데도 우리 정치인들은 수천만 수억원씩을 받고서도 탈이 나면 공짜 떡값이 무슨 죄냐고 항변하기 일쑤다. 검찰 역시 떡값에는 관대하다. 청와대 비서관이 27억원을 챙겼을 때도 21억원 어치는 떡값일 뿐이라며 처벌항목에서 제외시켰다. 서민들이 명절때 떡을 빚는 돈은 10만원도 채 안되는데 정치인들에게는 액수의 다과(多寡)를 불문하고 떡값이라고 하면 면죄부(免罪符)로 작용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이 은행에 특혜대출 외압을 넣지 않았더라도 비리를 번연히 알면서 국회에서 추궁 한번 하지 않고 돈을 받았다면 이는 분명한 대가다. 물론 그런 인과관계는 입증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검은 돈임이 분명한 데도 처벌하지 않거나 못한다면 국민정서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일이다. 이미 수억원대의 떡값 얘기가 나왔을 때부터 국민은 분노했고 정치불신의 골도 깊어졌다. 검찰이 영향력의 유무나 떡값 운운하며 상식이상의 거액을 받은 정치인들을 처벌하지 않는다면 불신은 검찰로 날아가게 된다.
검찰은 앞으로 정치인 소환조사에서 한보 돈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든 거짓없이 밝혀내고 또 공개해야 한다. 그러잖아도 검찰이 소환대상자를 선별한다고 하자 누군가 감춰주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일고 있다. 떡값이건 정치자금이건, 영향력을 행사했건 아니건 한보의 부정한 돈을 받은 정치인이 누구인지 국민들은 알 권리가 있다. 검찰은 이런 엄연한 사실을 바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