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택의 유럽연극기행]연극인 천국 모스코바

  • 입력 1997년 1월 7일 20시 07분


《올해는 「97 세계연극제 서울―경기」가 열리는 해. 우리 연극을 세계에 널리 알림과 동시에 우리도 세계 연극의 흐름과 적극적으로 만나야할 때다. 세계연극제 예술감독 이윤택씨(44·세계연극제 서울―경기 예술감독·연희단거리패 대표)가 일민문화재단의 「일민 펠로」로 선정돼 지난해 말 한달넘게 현대 연극의 메카인 베를린 모스크바 런던의 생생한 공연예술 현장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현대 실험극의 산실 베를린, 세계최대의 연극도시 모스크바, 셰익스피어와 뮤지컬의 도시 런던에 관한 이씨의 연극기행을 시리즈로 소개한다.》 모스크바는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연극 도시다. 연극 소개서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극장 수가 70여개에 이르고 이 극장들은 대부분 8백석을 넘는 대극장 규모를 자랑한다. 대학로에 산재한 소극장 규모를 포함한다면 극장 수가 얼마나 되는지 모스크바 현지인들도 파악하지 못한다. ▼ 대극장만 70여개 넘어 ▼ 더군다나 이런 극장들이 관객들로 넘쳐난다는 점에서 연극인과 연극애호가들에게는 천국의 도시처럼 느껴진다. 시국의 불안정과 빈부격차가 격심한 경제공황 속에서도 계층간의 구분없이 연극 관객이 몰린다는 점에서 러시아인들에게 연극은 일상생활의 한 부분처럼 여겨진다. 관람료가 싸다는 것이 또 하나의 특징이다. 2달러에서 10달러, 우리 돈으로 1천6백원에서 8천원 정도면 웬만한 연극은 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인기있는 연극은 쉽게 표를 구할 수 없고 암표상이 10배까지 받아 먹는다. 이번 겨울 시즌에 볼만한 연극들을 골라 본다면 볼쇼이극장의 「보리스 고두노프」 「스페이드의 여왕」, 크렘린 궁정극장의 「나폴레옹」, 바흐탄코프극장의 「투란도트」, 사트리콘극장의 「서푼짜리 오페라」 「로미오와 줄리엣」, 말리극장의 「벚꽃동산」, 타캉카극장의 「미소년」, 고골리 모스크바 드라마극장의 「혼수없는 처녀」,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갈매기」 「바냐 아저씨」, 랭콤극장의 「갈매기」등이 있다. 가히 세계 고전적 레퍼토리의 박람회 같은 느낌을 주는데 단연 돋보이는 레퍼토리는 역시 체호프의 4대 대표작이다. 20세기 러시아 사실극의 완성자라 일컬어지는 체호프의 연극은 러시아가 자랑하는 고정 레퍼토리이자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그러나 요즘 모스크바에서 제대로 된 체호프 연극을 골라 보기는 그리 쉽지 않다. 겉으로 가장 역사가 오래되고 이름난 모스크바 예술극장(일명 체호프 예술극장)은 유명도에 비해 연극 수준이 가장 떨어진다. 공연 중인 「바냐 아저씨」는 영화감독이 연출했는데 상업적 시류에 편승하여 일종의 신파극적 대중극이다. 체호프의 연극이 대중이나 관광객을 위한 엔터테인먼트로 전락한 느낌을 준다. 말리극장의 「벚꽃동산」은 국내에서도 공연된 바 있는데 현재 모스크바 연극 흐름으로 봐서는 구태의연함을 지울 수 없다. 모스크바에서 체호프의 사실극을 보려면 랭콤극장의 「갈매기」를 추천해 볼만하다. 랭콤극장은 체호프의 이름을 딴 거리 체호바에 위치해 있다. 랭콤극장의 「갈매기」는 키디스 국립 연극아카데미 현직교수 자하로프 연출작이다. 연출자 자하로프는 뒤늦은 나이에 각광받기 시작한 60대의 신예다. ▼ 영화 연극 경계없어 ▼ 그의 연출작 「갈매기」는 시종일관 관객들을 웃긴다. 그가 연출해 내는 웃음은 삶의 허점을 찌르면서 터뜨리는 천진성과 아울러 쓸쓸한 페이소스를 동반한다. 삶의 비애를 웃음으로. 이 정서는 바로 생전의 체호프가 『내 연극은 희극이다』고 주장했던 사실과 일치한다. 여주인공 아르카지나역을 맡은 공훈배우 나나 추리코바는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린애같은 천진성과 폭발적인 감정의 변화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극장을 압도한다. 그의 연인 트리고린역은 알렉 얀코프스키가 맡았는데 얀코프스키는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노스탤지어」 주인공으로 국내 영화 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유명 영화배우가 연극에, 그것도 조연으로 출연하는 것을 보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의 놀라운 연기에 압도당하면서 연극과 영화의 경계가 없는 러시아 배우들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러시아 사실극은 한 마디로 배우의 연극이다. 낮은 음에서 순식간에 우레와 같은 외침까지, 시선에서 손가락 끝까지 자신의 심리적 정서를 표현해 내는 배우들을 보면서 연극은 역시 배우예술이다는 말을 실감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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