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193)

  • 입력 1996년 10월 23일 21시 01분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기〈41〉 나는 눈도 뜨지 못한 채 힘없이 벽에 등을 기댔다. 내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너 무 낯설었다. 『여보세요』 『…』 나는 눈을 떴다. 방안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뜨 니 시야가 조금 선명해지는 듯 싶었다. 나는 전화기를 바꿔 쥐었다. 『여보세요?』 『…진희냐?』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튼 집에 와서 얘기하자. 집? 집이란 게 뭘까?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어서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장소? 그 럼 그곳이 상처 입은 채 흘러가버린 시간을 돌이켜줄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하 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집을 떠나는 날까지 이 삶을 조금 멈춰갈 수는 있을 것 이다. 아주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전화를 끊고 다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간이역처럼 어설펐다. 긴 잠에서 깨어난 나는 내가 왜 이 간이역의 의자에서 잠들었는지 한참동안 생각 해 보았다. 상현과 함께 산 육년. 참으로 긴 꿈이었다.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간 후 나는 다시 아버지의 딸이 되었다. 새엄마는 그다지 변 하지 않았지만 동생과 아버지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초등학생이던 애리는 고삼으 로 자라났다. 아버지는 늙었고 그리고 암에 걸려 있었다. 수술받은 지 벌써 일년반 이나 지났다고 말하는 아버지의 뺨에 검버섯이 두드러졌다. 아버지와 헤어질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나는 마음속으로 쓰 게 웃었다. 삶이 또 한 번 나를 속이고 앞질러갔다는 느낌이 들었다. 집에서 보냈던 그 겨울 두 달 동안 나는 거의 방에 처박혀 있었다. 삼월이 되자 나는 대학원에 복학했다. 애리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합격하여 나와 같은 기차를 타 고 올라왔다. 서울역에 내린 애리는 갑자기 「어머!」하고 조그맣게 탄성을 뱉었다. 애리가 보 는 것은 남산타워였다. 언젠가 내가 낯선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려고 오랫동안 노려보았던 남산타워의 불빛. 애리는 그 불빛을 입가에 웃음을 띠고 눈을 반짝이며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도 애리와 같은 각도로 서서 그녀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남산 타워를 보려고 해보았다. 그러나 내 눈은 어느틈에 다시 찡그려졌다. <글 은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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