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에 대한 알·쓸·변(알고 보면 쓸데없는 변명) [장환수의 수(數)포츠]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7월 12일 17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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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폭우가 내리는 날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프로야구단 OB(현 두산)의 OB 모임. 전·현직 프런트와 왕년의 출입기자들이 가끔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두산이 김태형 감독 취임 후 7년 만에 위기를 맞았어.”

“요즘 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올해 계약이 끝나는 김 감독이 내년에도 두산에 있을까.”

현직이 듣기엔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우리끼리야 무슨 말을 못하겠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역시나 그의 근황이 나왔다.

“영감이 올해는 오히려 승격을 했대. 감독 고문이라나.”

“그뿐이겠어. 유니폼 입고 더그아웃에도 나온대.”

“장 국장, 이제 영감 기사는 그만 써.”

김성근 감독(80·일본 소프트뱅크 감독 고문) 얘기였다. 스포츠마케팅 연구와 국내 야구기록 전산화에 큰 역할을 한 정희윤 전 스포츠산업경제연구소장의 취중 발언으로 화제는 바뀌었다. 모임의 맏형인 그는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1998년까지 OB에서 기획, 홍보, 운영팀장을 거치며 80년대에 김 감독을 근거리 보좌했다. 기자가 오랫동안 믿고 따르는 형님이긴 하지만 하지 말라고 하니 불현듯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걸 어쩌나.

영웅이냐 독선이냐…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평가
기자는 김성근 영웅 만들기의 초기 집필자 중 한 명이다. 태평양 감독 시절 만나 그가 왼손으로 깨알같이 적은 히라가나 수첩을 통해 야구를 배웠다. 처음엔 참 다가가기 힘든 괴팍한 사람이었지만 마음을 여니 딴 사람이었다. 오로지 야구 얘기뿐이었다. 열정과 진심이 느껴졌다.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여태 그런 이를 본 적이 없었다. 기자라고 봐주는 것도 없었다. 그게 더 좋았다. 짧은 선수 생활과 재일교포의 핸디캡을 안은 채 지도자로 출발한 그가 한국 야구의 영웅이 돼가는 과정을 그래서 때로는 좀 더 부풀려 기록해왔다.

그러나 야구계에서 그만큼 평가가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야신(野神·야구의 신)으로 불리며 강력한 팬덤을 보유했지만 독선, 폭압, 혹사, 벌떼, 승리지상주의 등 온갖 비난을 안고 살았다. 마치 요즘 대통령들 여론조사 결과와 흡사하다. 매우 잘하거나 못한다는 의견이 대체로 잘하거나 못한다는 의견을 압도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옳고 그름을 따져보기보다는 서로 패거리를 나눠 좋고 싫음을 쏟아내는 패턴이다. 독자들이 참여해 만들어가는 나무위키를 보면 그야말로 방대한 사료와 일화가 나오는데 같은 사안을 두고도 상반된 의견이 혼재한다.

7개 구단 감독으로 23시즌 보내

이럴 때는 주장보다는 객관적 자료를 찾아보는 게 상책이다. 우선 김성근은 20대 중반인 1969년 마산상고 감독 취임 이후 기업은행, 충암고, 신일고까지 해임은 됐어도 쉬어본 기간은 거의 없다. 프로야구 원년인 1982년 OB 코치에 이어 사상 최다인 7개 구단 감독으로 23시즌을 보냈다. 김응용의 24시즌(3개 구단)에 이은 2위 기록이다. 나머지 18시즌동안은 투수코치, 2군 감독이나 독립리그 고양 원더스 감독,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인스트럭터 등을 맡았다. 한 순간도 그라운드를 떠난 적이 없다. 한화 마지막 해인 2017년은 국내 최고령 감독(75세)이었다. 생소한 직책인 코치 고문에서 감독의 멘토라는 감독 고문으로 승격된 올해 역시 소프트뱅크의 정식 코치로서 일본 최고령 지도자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김성근이 처세술이 좋아서 이렇게 많은 구단의 부름을 받았을까. KIA 2군 감독까지 포함하면 김성근이 활약한 당시 9개 지역 연고 구단 중 그가 입어보지 않은 유니폼은 부산의 롯데가 유일하다.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논리로 결정된다. 그를 필요로 하니 모셔갔을 것이다.

‘김성근의 저주’?

‘김성근의 저주’란 말이 있다. 재임기간 선수들의 능력을 쥐어짜내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소모품으로 전락한 선수들은 혹사당해 그가 떠난 팀은 하위권으로 급락한다는 것.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게 LG의 경우다. LG는 2002년 정규시즌 4위를 했지만 현대와 KIA를 연파하고 한국시리즈에 올라 한참 위 전력으로 평가받던 김응용의 삼성에 아쉽게 졌다. 결과는 2승 4패였지만 누가 이길지 모르는 살얼음판 승부였다. ‘야신’이란 별명은 이때 김응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지어준 것이다. 그러나 김성근은 팬들의 환호와는 달리 연말에 해임 통보를 받았다. 그동안 누적된 구단과의 갈등이 문제였다. 이후 LG는 그 유명한 ‘6-6-6-8-5-8-7-6-6-7’의 10년 암흑기를 헤맸다.

이 저주는 김성근 팬들에겐 반격의 카드로 활용되기도 했다. 거 봐라, 김 감독을 자르고 나니 예전으로 돌아갔지 않나. 감독을 2년도 채 못했는데 10년간 부진했다면 다른 데서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나. 그러면서 김성근의 저주가 아니라 그를 내친 LG 구단의 저주로 바꿔 불렀다. 그렇다면 김성근이 거쳐 간 나머지 팀의 성적은 어땠을까. 신기하게도 OB-태평양-삼성-쌍방울-LG-SK-한화 가운데 순위가 떨어진 팀은 LG가 유일하다. 수치로만 따지면 김성근의 혹사 의혹은 증명할 수 없는 셈이다.

‘마리한화’ 열풍 이끌었지만…


반대로 순위가 급등한 팀은 2018년 한화가 유일한데 기자는 이게 오히려 의미가 있어 보인다. 김성근은 2년 연속 꼴찌 한화를 맡아 2015년 와일드카드 턱밑인 6위로 끌어올리며 ‘마리한화’ 열풍을 이끌었지만 이후 7위, 8위로 주춤하면서 중도 해임됐다. 한화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모습에서 김성근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다. 김성근이 7위 이하의 성적표를 받은 것은 쌍방울 해체 직전 중도 해임된 1999년 8위 이후 처음이다. 한화는 2018년 한용덕이 지휘봉을 이어받자 3위로 반짝했다. 굳이 변명을 붙이자면 김성근에 앞서 2013~14년 꼴찌 사령탑은 V10에 빛나는 김응용이었다. 2009년 이후 최악의 팀 한화는 천하의 두 김 감독에게도 무덤이었던 셈이다. 물론 김응용은 김성근만큼 융단폭격을 당하지는 않았다.

김성근이 지휘봉을 잡은 첫 해에 성적이 오르지 않은 팀도 유일한데 바로 삼성이다. OB는 1984년 한국시리즈엔 오르지 못했지만 전후기 통합 승률로는 1위에 올랐다. 만년 꼴찌 쌍방울은 1996년 정규시즌 2위로 점프했다. 6위였던 SK는 2007년 곧바로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컵을 안았다. LG와 한화는 위에서 언급한 대로다. 항상 우승후보지만 독선과 폭압의 아이콘이란 김성근조차 장악하지 못한 삼성은 분명 그의 실패작이었다. 삼성은 10년이 지나 김응용이 취임한 이듬해인 2002년에야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처음 안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상대는 김성근의 LG였다.

한화를 거치면서 요즘 여론은 안티가 훨씬 많아진 것 같다. 나무위키도 비난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최소한 김성근이 이끌었던 선수들은 대부분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엔 심각한 부상을 당했거나 2군을 들락거렸던 선수들도 있다. 사람의 평가는 조직 내부의 것이 가장 정확하다. 선수들은 그가 야구를 하는 의미를 알게 해줬다는 말을 많이 한다. 물론 김성근에 대한 악담을 하는 선수도 있긴 하다.

김성근이 감독으로 돌아오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비 오는 날 뜬금없이 생각난, 김성근에 대한 알쓸변(알고 보면 쓸데없는 변명)이었다. 안티 팬들은 부디 너그럽게 봐주시길 바란다.

장환수 기자 zangpab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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