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서 널 볼때마다 난 지옥” 학폭 피해자들 SNS 응징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15일 17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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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친구들은 그래도 인터넷이 있어서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땐 정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회사원 A 씨(41)도 서울 한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같은 반이었던 B 씨로부터 상습적으로 폭행을 당했다. 세월이 흘러 B 씨는 모던 록 밴드 멤버로 유명인이 됐다. A 씨는 “그때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다 통화연결음(컬러링)으로 그 사람 노래가 들리면 치가 떨렸다. 하지만 그냥 혼자 참을 수밖에 없었다”며 “이젠 인터넷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발달해 적어도 피해자가 자기 목소리는 낼 수 있어 다행이다”고 말했다.

최근 학교 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학교폭로 미투(학투)’는 어려서부터 인터넷을 접한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주도하고 있다. MZ세대가 인터넷에서 많이 사용하는 게시물 형식 가운데 하나가 ‘썰’이다. ‘말씀 설(說)’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 표현은 경험담을 뜻할 때가 많다. 이 썰로 가장 유명한 인터넷 공간 ‘네이트 판’이 학투 운동 중심지로 떠오른 이유다.



2006년 문을 연 판은 익명 기반이라 학교 폭력 피해자들이 심리적 부담을 최소화한 상태로 자기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판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폭로가 이어지고 있는 이유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과거에는 피해자들이 (학폭 피해를) 개인적인 상처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면 최근 몇 년간은 학폭 사실이 밝혀지며 실제로 퇴출되는 연예인이나 운동 선수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며 “폭로가 가져온 실제 결과들을 보면서 다른 피해자들도 용기를 얻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폭로는 치유로 가는 첫 걸음이기도 하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성종호 대한의사협회 정책이사는 “피해자 입장에서 폭로 역시 엄청난 불안감과 공포감을 동반해 이뤄지는 것”이라며 “상처 회복은 폭로만으론 이뤄질 수 없고 피해자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에서 가해자의 진심어린 사과가 피해자의 용서로 이어질 때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원래 연예인이 주요 대상있던 학투가 체육계 특히, 프로배구 여자부에서 제일 먼저 시작된 건 여자 배구선수가 매체 노출이 가장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현 건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가해자가 자신도 모르게 피해자들이 잊고 살아가려고 했던 과거의 상처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면서 그 상처가 되살아나 강한 심리적 반응으로 나타난다”며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심리는) 가해자들이 꼭 처벌을 받아야 한다기보다 ‘최소한 너무 많은 걸 가지려 하지 말고 조용히 살라’는 것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물론 익명으로 올라온 폭로를 모두 믿을 수는 없다. 판에는 거짓 내용도 많아 소설 같다고 해서 ‘판춘문예’(판+신춘문예)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을 정도다. 실제로 국가대표 골키퍼로 유명했던 김병지 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51)은 판에 올라온 아들의 학폭 관련 의혹 때문에 서둘러 유니폼을 벗어야 했지만 결국 법원에서 무효 판결을 받았다.



한편 학교 체육에서 대물림 되는 폭력 사태를 근절하려면 무엇보다 ‘합숙’ 문화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이번에 학폭 가해 사실을 인정한 OK금융그룹 송명근 선수(28) 역시 고교 시절 ‘맞는 게 싫어서’ 합숙소를 떠나 사흘간 가출한 경험이 있는 ‘피해자’이기도 했다.

한 학부모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3만 달러가 넘는 나라에서 운동선수를 꿈꾸는 많은 학생들이 군부대 내무반 같은 방에서 함께 부대끼며 선배들 잔심부름을 하는 게 현실이다”며 “부모들 시선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상태라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도 어렵다. 집에서 등하교만 해도 폭력 문제가 크게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김태성 기자 kts571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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