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발로 ‘4강 기적’ 역사를 썼다니… 부상에 멈춘 정현의 도전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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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오픈 페더러전 2세트에 기권
“3회전 마친 뒤 양발 물집 심해져… 조코비치전부터 진통제 맞고 뛰어, 걷기도 힘들어 다음 생각해 포기”
페더러 “정신력-체력 톱10감” 칭찬


정현이 로저 페더러와의 4강전을 기권한 뒤 공개한 자신의 오른쪽 발바닥. 물집이 심하게 잡혔다. <정현 인스타그램>
정현이 로저 페더러와의 4강전을 기권한 뒤 공개한 자신의 오른쪽 발바닥. 물집이 심하게 잡혔다. <정현 인스타그램>
《한국 테니스의 간판 정현(22·한국체대·사진)이 발바닥 부상으로 메이저 대회 결승 진출이 좌절됐다. 세계랭킹 58위 정현은 26일 열린 호주오픈 테니스대회 남자 단식 준결승에서 세계 2위 로저 페더러(37·스위스)와 겨루다 발바닥 물집이 악화돼 2세트 도중 기권했다.》

기자회견에 앞서 대기실에 앉아 있던 정현(22·한국체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올 정도로 발바닥 상태가 나빴다. 심하게 터진 물집은 오른발에 2개, 왼발에 1개가 있었다. 생살이 벌겋게 드러날 정도였다. 저 발을 갖고 한국 테니스 역사를 다시 썼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정현이 로저 페더라와의 호주오픈 4강전 2세트 도중 메디컬 타임아웃을 불러 치료를 받고 있다. <대한테니스협회 제공>
정현이 로저 페더라와의 호주오픈 4강전 2세트 도중 메디컬 타임아웃을 불러 치료를 받고 있다. <대한테니스협회 제공>
정현이 부상 악화로 호주오픈 테니스 준결승에서 기권했다. 세계 랭킹 58위 정현은 26일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남자 단식 4강전에서 세계 2위 로저 페더러(37·스위스)에게 1세트를 1-6으로 내준 뒤 2세트 게임스코어 2-5, 30-30에서 심판에게 경기를 포기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정현은 2세트 1-4에서 메디컬 타임아웃을 부르며 계속 플레이 의지를 밝혔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경기 후 정현은 3회전을 마친 뒤 물집이 심해져 노바크 조코비치(세르비아)와의 16강전부터 계속 진통제를 맞고 코트에 나섰다고 털어놓았다. “처음엔 오른발에만 맞다 나중엔 왼발까지 안 좋아져서 진통제도 듣지 않는 것 같았다”고 했다. 메디컬 타임 상황에 대해 그는 “오른발은 응급조치조차 의미가 없을 만큼 상황이 안 좋아 왼발에만 테이핑을 다시 했었다”고 설명했다.

기권에 앞서 심각한 고민도 했다. 정현은 “두 가지 생각을 했다. 준결승까지 왔는데 팬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하지만 너무 아파 걷기조차 힘들었고 앞으로 남은 시간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정현의 호주오픈 돌풍을 대서특필하고 있는 호주 주요 일간지<멜버른=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정현의 호주오픈 돌풍을 대서특필하고 있는 호주 주요 일간지<멜버른=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페더러는 “정현은 차세대 선두주자가 분명하다. 세계 1위, 메이저 우승 같은 부담에서 벗어나 평정심을 갖는 게 중요하다. 테니스는 스케줄이 너무 빡빡하기에 잘 관리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정현은 ‘톱10’에 들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번 대회에서 정현은 준결승에 오르기까지 7경기(복식 2경기 포함)를 치렀다. 직전까지 메이저 대회에서는 3회전이 최고였다. 이날 멜버른에는 보기 드물게 굵은 비가 쏟아져 경기장소인 로드 레이버 아레나의 지붕을 덮고 경기를 해 사실상 실내경기였다.



반면 메이저 19회 우승에 빛나는 페더러는 한 템포 빠른 플레이로 정현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습도가 높고 메아리가 큰 실내경기에서 페더러의 묵직한 스트로크는 더욱 위력을 떨쳤다. 가뜩이나 발놀림이 안 좋은 정현은 페더러의 속사포 공격에 제대로 스텝을 옮길 수 없었다.

정현은 “아쉬움은 물론 크다. 하지만 올해 목표였던 한국 선수 최고 랭킹 기록과 메이저 대회 최고 성적을 모두 깨뜨렸다. 이젠 부상 없이 한 시즌을 잘 마치고 싶다”고 말했다.

코트를 떠나는 정현은 관중석을 향해 한 손을 흔들었다. 재치 있는 사인 이벤트는 없었지만 1만5000명의 만원 관중은 떠나는 정현에게 기립박수와 위로의 박수를 보냈다. 정현은 페더러를 상대로 서비스 에이스도 기록했고 페더러의 허를 찌르는 패싱샷을 선보여 팬들의 환호를 자아내기도 했다.

정현이 10세 때인 2006년 서울에서 열린 로저 페더러와 라파엘 나달 친선경기에서 볼보이로 나선 모습. 정현은 아래줄 왼쪽에서 두번째.
정현이 10세 때인 2006년 서울에서 열린 로저 페더러와 라파엘 나달 친선경기에서 볼보이로 나선 모습. 정현은 아래줄 왼쪽에서 두번째.
정현은 10세 때인 2006년 서울에서 열린 페더러와 나달의 시범경기에 테니스 선수인 형 정홍과 볼보이로 나선 인연이 있다. 이날 호주오픈 조직위원회는 당시 기념촬영 사진을 트위터에 공개하며 둘 사이의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꼬마 정현은 자신에게 사인을 해준 페더러 같은 대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사연으로 정현은 이날 안 좋은 몸 상태에도 의욕을 보였다.

테니스 감독 출신인 정현의 아버지 정석진 씨는 “현이가 이렇게 오랫동안 뛰어본 것도 처음이다. 많은 걸 배웠을 것이다”고 말했다. 물리치료사로 일했던 어머니 김영미 씨는 “통증 정도를 1-10으로 구분한다면 현이 상태는 11 이상이었다고”고 전했다. 정현은 28일 귀국한다.

역대 메이저 최다인 20번째 우승을 노리는 페더러는 28일 결승에서 세계 6위 마린 칠리치(크로아티아)와 맞붙는다.

멜버른=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정현#페더러#테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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