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 하나에도 정성 가득 ‘배려왕 이승엽’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8월 30일 05시 45분


삼성 이승엽(오른쪽)은 실력이면 실력, 인성이면 인성, 빠질 것 없는 선수다.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타의 모범이 되는 이승엽이 18일 수원 kt전에서 어린이 팬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어린이팬에게 사인을 해줄 때에도 늘 배려를 해주는 이승엽이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삼성 이승엽(오른쪽)은 실력이면 실력, 인성이면 인성, 빠질 것 없는 선수다. 그라운드 안에서나 밖에서나 타의 모범이 되는 이승엽이 18일 수원 kt전에서 어린이 팬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어린이팬에게 사인을 해줄 때에도 늘 배려를 해주는 이승엽이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국민타자? 국민배려꾼 이승엽
경기 전 인터뷰·사인회도 성실
“팬들이 원하면 감사히 해야죠”


야구는 ‘희생’이 공식적으로 기록되는 유일한 스포츠 종목이다. 희생의 몫은 테이블세터 혹은 타격이 약한 하위타선 타자들의 몫인 경우가 많다.

2012년부터 올 시즌 8월29일까지 삼성 이승엽(40)은 598경기를 뛰었다. 그 중 희생번트로 기록된 숫자는 단 1이다. 5년의 시간 동안 희생플라이를 제외한 희생타는 단 한 번뿐이었다는 의미다. 같은 기간 같은 팀 박한이는 522경기를 뛰면서 67개의 희생번트, 김상수는 580경기 54개의 희생번트를 기록했다.

한편으로 보면 이승엽은 희생, 그리고 배려와는 가장 거리가 먼 팀의 중심타자를 맡고 있다. 그러나 그라운드 안에서 이승엽은 늘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으로 팬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주고 사랑을 받고 있다. 한·일 개인통산 600홈런에 2개를 남겨둔 위대한 홈런타자지만, 극적인 상황에서 터져 나온 홈런을 제외하면 평소 홈런 세리머니는 언제나 겸손하다. 흔히 홈런을 치고 난 뒤 방망이를 던지는 ‘배트 플립’도 하지 않는다. 초대형 홈런을 날리고도 홈런을 맞은 상대 투수의 기분을 생각해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그라운드를 돈다.

야구장 밖의 이승엽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야구선수 이승엽보다 더 겸손하다. 단순히 스포츠 스타로 의무감을 다하기 위함이 아닌 진정한 마음으로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은 훈훈함을 넘어 따뜻함으로 전해온다.

그는 2011년 일본 오릭스에서 뛸 때 도호쿠 지방에서 대지진이 일어나자 구단을 찾아가 기부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일본프로야구팀은 개인 이름이 아닌 팀 이름의 기부 문화가 보편적이다. 팀원의 한사람으로 기부에 동참한 이승엽은 국내 방송사에 따로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며 성금을 전했다. 홀로 기부금을 낸 사실이 팀 동료들에게 큰 부담이 될 수도 있음을 헤아린 행동이었다.

이승엽은 일본으로 진출하기 전 어린 시절부터 남몰래 불우이웃돕기를 많이 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에 앞장섰다. 홈런수에 따라 기금을 적립하거나, 기념비적인 홈런을 기록한 뒤 구단으로부터 상금을 받으면 어려운 이웃에 기부를 하곤 했다. 각종 시상식, 연봉 계약 후에도 다양한 기부활동도 하고 있다.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며 선행을 이어가고 있다.

금전적으로만 도움을 건네지 않는다. 지난해 세월호 사고로 세상을 떠난 단원고 김호연 군의 유가족을 올스타전에 초대했고, 올해는 급성 골수성 백혈병 투병 중인 홍성욱 군을 올스타전에 초청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는 일본과 4강전에서 결정적 2점 홈런을 때리며 승리를 이끈 후 “그동안 동료들에게 너무 미안했다”며 눈물을 흘려 큰 울림을 전하기도 했다. 정작 본인은 팀 내 입지가 약화돼 시즌 중 열린 올림픽에 참가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지만, 오롯이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뒤로하고 헌신을 다하던 순간이었다.

이승엽은 2015시즌 말부터 2017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국내 프로스포츠에서 대스타가 은퇴 시점을 미리 대외적으로 밝히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미 나이는 40대가 됐지만 여전히 리그 정상급 기량을 선보이고 있기 때문에 그 선택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졌다. 이승엽은 “미리 은퇴 시점을 알려야 구단도 전력구성 등 장기적인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답했다. 은퇴라는 큰 결정 앞에서도 나보다 상대방을 더 존중하고 배려하겠다는 진심이었다.

23일은 ‘야구의 날’이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획득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날로, KBO는 구단별로 2명씩 지정해 사인회를 열었다. 다른 구단들은 대부분 젊은 선수들이 팀을 대표해 사인회에 등장했다. 그런데 삼성은 팀에서 유일한 40대 선수인 이승엽이 대표 선수 중 한명으로 나섰다. 경기 전 사인회 참석은 사실 많은 선수들에게 부담스러운 시간이다.

이승엽으로선 충분히 사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홈구장에서 열린 사인회를 앞두고 이승엽은 또 한번 배려를 먼저 선택했다. 이날 일찍 야구장에 나와 훈련을 마친 뒤 한·일 개인통산 600홈런 도전에 대한 방송사 인터뷰를 성실히 마쳤다. 그리고 사인회장으로 가며 “팬분들이 젊은 선수들이 나가는 걸 더 좋아하실 것 같은데…”라며 웃었다. 주변에서 “아니다. 팬들이 가장 원하는 선수는 여전히 이승엽이다”고 말하자 “그럼 감사히 열심히 해야죠”라는 답이 곧장 돌아왔다. 이승엽은 정성껏 사인회를 마쳤다.

이승엽이 ‘위대한 타자’로 평가받는 것은 단순히 홈런 숫자가 많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라운드 안팎에서 남을 위한 배려와 헌신에 앞장서고 있기에 슈퍼스타를 넘어 ‘위대한 타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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