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국의 야구여행] 기회, 준비된 자에게만 울리는 초인종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5월 20일 05시 45분


기회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만, 그 한번의 기회를 잡는 건 준비된 자만이 가능하다. 넥센 포수 박동원도 마찬가지다. 박동원은 2014년 당시 백업선수였지만 주전포수 허도환의 결장을 틈타 기회를 잡고 지금까지 놓지 않고 있다.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기회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만, 그 한번의 기회를 잡는 건 준비된 자만이 가능하다. 넥센 포수 박동원도 마찬가지다. 박동원은 2014년 당시 백업선수였지만 주전포수 허도환의 결장을 틈타 기회를 잡고 지금까지 놓지 않고 있다. 사진제공|넥센 히어로즈
허도환의 배탈…그날 이후 넥센 주전포수는 박동원
월리 핍의 두통…그날 이후 뉴욕Y 1루수는 루 게릭
기회는 어느 날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손님’
준비하고 있는 자만에게만 기회의 초인종 울린다


#1. “감독님, 허도환이 설사를 해서 경기에 못 나갈 것 같다고 합니다.”

2014년 7월 8일 청주구장. 넥센 이지풍 트레이닝코치는 한화전을 앞두고 염경엽 감독을 다급하게 찾았다. “그럼 쉬라고 해.” 염 감독은 그 자리에서 한마디만 했다. 그리고는 선발 라인업을 수정했다.

배탈을 만난 주전포수, 그러면서 기회를 만난 백업포수. 그날 이후 이들의 운명이 엇갈렸다. 9번타자로 선발출장한 백업포수는 2회 첫 타석에서 2루타를 치더니 3회엔 3점홈런을 날렸다. 3타수 2안타 3타점 2득점으로 팀의 17-3 대승을 이끌었다. 다음날 한화전에서도 9번 포수로 선발출장해 5타수 3안타 2득점을 올리며 팀의 13-1 승리에 힘을 보탰다.

새 안방마님은 이제 강민호(롯데), 양의지(두산) 부럽지 않은 국내 최고 포수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19일까지 타율 0.270(137타수 37안타)에 8홈런과 33타점. 팀 내 최다홈런과 최다타점이며, 10개 구단 포수를 통틀어 최정상급 타격 성적이다. 수비 능력도 일취월장이다. 올 시즌 40차례 도루시도 중 17차례나 저지해 도루저지율은 0.425를 기록 중이다. 바로 박동원(26) 얘기다.

염 감독은 아직도 2년 전 그 일을 떠올리면 웃음이 난다. “사실 당시 팀의 미래를 생각해 박동원을 주전포수로 키워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허도환은 그 전 해에 내가 감독을 처음 맡았을 때 주전포수로 팀을 4강으로 이끌었다. 아무 이유 없이 주전포수를 바꿀 수 없었다. 그런데 그때 허도환이 설사를 만나 쉬게 됐고, 박동원이 그 기회를 잡았다. 주전선수는 자리를 함부로 비우면 안 된다. 프로는 더 그렇다.”

허도환은 이듬해인 2015년 한화로 트레이드 됐고, 박동원은 올 시즌 한층 더 성장한 기량으로 넥센의 돌풍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2. “감독님, 머리가 너무 아픕니다.”

1925년 6월 2일. 뉴욕 양키스의 월리 핍은 경기를 앞두고 타격훈련을 하다 머리에 공을 맞았다. 핍은 1916년과 1917년 2년 연속 홈런왕에 올랐고, 1923년 109타점을 기록하며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끈 양키스의 간판타자이자 주전 1루수. 1924년에도 110타점으로 베이브 루스 등과 함께 타선의 핵으로 맹활약했다. 그러나 이날 핍이 경기 전 두통을 호소하자 밀러 히긴스 감독은 이미 작성했던 선발 라인업을 수정해야했다. 전날 유격수 폴 웨닝거를 대신해 대타로 나섰던 22세의 유망주를 선발 1루수 자리에 올렸다.

그런데 이 유망주는 이날 2안타를 쳐내더니, 이후 14년간 단 한 경기도 빠지지 않고 양키스의 1루수 자리를 지켰다. 바로 메이저리그 최초 영구결번(4) 선수인 ‘철마’ 루 게릭이다.

원인 모를 ‘퇴행성 근육위축경화증세(루게릭병)’로 인해 1939년 2130연속경기출장을 마지막으로 ‘철마’는 멈춰 섰지만, 그의 연속경기출장 기록은 훗날 ‘철인’ 칼 립켄 주니어(2632연속경기)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세상에서 가장 깨지기 힘든 기록’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통산타율 0.340, 493홈런, 1995타점. 3차례 홈런왕과 4차례 타점왕, 2차례 아메리칸리그 MVP를 차지했다.

게릭은 독일에서 이민 온 술주정뱅이 아버지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우유와 세탁물을 배달하며 어렵게 야구를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악착 같이 야구를 한 게릭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1루수로 큰 발자국을 남겼다.

핍은 이듬해인 1926년 신시내티로 트레이드된 뒤 1928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훗날 핍은 ‘난 그날 세상에서 가장 비싼 두통(most expensive headache)을 앓았다’고 돌이켰다.

#3. “내 선수생활 마지막해인 2009년에 개성고를 졸업한 포수가 스프링캠프에 따라왔다. 몸이 비쩍 말라 있었다. 지금 김하성이나 유재신 같은 몸매여서 저런 몸으로 포수를 볼 수 있을까 싶었다.” 2014년까지 넥센 배터리코치를 지내며 박동원의 성장을 이끈 김동수 현 LG 퓨처스 감독의 기억이다.

“박동원이 2010시즌이 끝나고 바로 상무에 입대했는데, 제대하고 돌아온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몸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군대에 있었던 2년 동안 얼마나 준비를 했는지 한눈에 보였다. 어깨도 워낙 좋고 타격 재능도 있었지만, 이런 멘탈을 가지고 노력하는 선수라면 반드시 성공할 것으로 봤다. 아직 세밀함에서 조금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제 정말 강민호나 양의지에 견줄 만한 최고 포수로 성장하고 있다.”

떡 벌어진 어깨, 에릭 테임즈(NC) 못지않은 우람한 팔뚝. 파워의 원천이다. 박동원은 상무 시절 역도부 선수들과 웨이트트레이닝을 하면서 몸을 만들었다.

“역도부 선수였던 형이 ‘웨이트 한번 배워볼래?’라고 해서 함께 웨이트트레이닝을 하기 시작했어요. 저는 제 몸이 얼마나 변했는지 몰랐는데 제대를 하니 친구들이 제 몸을 보고 놀라더라고요. 2013년에 팀에 복귀했을 때 감독님이 기회를 주시기도 했지만, 그땐 타율도 형편없고 도루저지도 잘 안 됐습니다. 계속 백업이었죠. 그래도 언젠가는 기회가 올 거라고 믿었어요. 포기하지 않고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힘들게 얻은 자리인 만큼 이 자리를 쉽게 넘겨주고 싶지 않습니다.”

지난해 올스타전 때 감독추천선수로 ‘별들의 잔치’에 참가한 뒤 “부산 촌놈이 여기까지 와서 좋다”며 싱글벙글했던 박동원은 이제 “앞으로 강민호 양의지 선배를 보고 배우면서 그 실력까지 도달한다면 국가대표가 돼 보는 게 소원이다”며 웃는다.

설사 때문에, 두통 때문에…. 기회는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손님과 같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그 기회라는 손님은 준비된 자에게만 초인종을 울린다는 사실이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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