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호… 속에 불난 4월, 손에 불난 5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5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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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유인구’에 속 태우던 이대호
5월 들어 펑펑펑 연일 짜릿한 손맛

“이승엽과 김태균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지난해 일본 프로야구 오릭스로 연수를 갔던 노석기 LG 전력분석팀 과장(당시 SK 전력분석 코치)의 말이다. 당시 오릭스 유니폼을 입고 있던 이승엽(현 삼성)과 롯데 김태균(현 한화)은 연일 고전 중이었다. 이들의 실력이 모자라서 한 얘기가 아니었다. 노 과장은 “일본 투수들은 한국 선수에게 홈런 맞는 걸 병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한국 선수에게 홈런을 맞은 투수를 2군으로 보낸 감독도 있었다. 이 때문에 일본 투수들은 한국 선수와 승부를 하려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본 투수들의 제구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올해만 해도 29일 현재 양 리그에서 1점대 평균자책을 기록 중인 선수가 13명이나 된다. 이들이 던지는 유인구는 스트라이크와 볼 사이를 절묘하게 넘나든다. 이승엽의 회고 한 토막. “한국에선 2스트라이크 3볼 상황이면 웬만하면 스트라이크를 던진다. 그런데 일본 투수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포크볼로 유인구를 던지더라.” 유인구를 참지 못하면 질 수밖에 없다. 마음이 조급해지면 안 좋은 공에 방망이가 나가고 스윙 밸런스가 무너진다. “용병으로서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이승엽은 이 고비를 넘지 못했다. 15개의 홈런을 쳤지만 타율이 0.201에 그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대호의 4월도 잔인했다. 일본 투수들은 스프링캠프와 시범경기에서 좋은 공으로 살짝 시험해 보더니 정규시즌이 되자 투구 패턴을 180도 바꿨다. 유인구 일변도의 승부를 한 것이다. T-오카다 등의 부진 속에 집중견제를 받은 이대호는 4월까지 홈런 2개에 타율 0.233에 머물렀다. 4월 18일 소프트뱅크전에서 4타수 무안타에 그치며 타율이 1할대(0.196)로 추락하기도 했다. 단 하나 고무적이었던 건 이대호가 인내를 보여줬다는 점이다. 타율은 안 좋았지만 볼넷을 14개나 골랐다. 리그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5월 들어 상황은 달라졌다. 일본 투수들이 이대호에게 정면승부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대호가 만만해져서가 아니다. 승부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대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19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선 1-2로 뒤진 9회 2사 후 상대 마무리 토니 버넷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 2점 홈런을 쳤다. 이튿날 경기에선 2-1로 앞선 9회 오시모토 다케히코를 상대로 쐐기 2점포를 터뜨렸다. 25일 히로시마전에선 3-3 동점이던 연장 10회 무사 1, 2루에서 일본 무대 첫 끝내기 안타도 날렸다. 5월 들어서만 8홈런에 타율 0.312(80타수 25안타)의 상승세다.

일본 투수도 완벽할 순 없다. 10개를 던지면 실투가 한두 개 나오기 마련이다. 이대호는 먹이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참고 기다리다 실투가 들어오면 좋은 타구로 만들어냈다. 최근에는 투수들의 유인구까지 안타로 연결했다. 이렇게 되면 오히려 투수들이 쫓기게 된다. 노 과장은 “원래 좋은 타자였지만 일본처럼 타자들에게 불리한 현실에서 제 실력을 발휘하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한 타자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이대호#오릭스#홈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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