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 몰라 벌타 부른 초보캐디 아버지… 그래도 내 곁엔 당신뿐이었습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2월 28일 03시 00분


PGA 첫승 감격 ‘필드의 저니맨’ 존 허의 思父曲

《 청바지에 큼직한 골프백을 둘러멘 모습이 어색하지 않았다. 1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의 리비에라CC에서 만난 재미교포 프로골퍼 존 허(허찬수·22)였다. 당시 그는 미국프로골프(PGA)투어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밝은 얼굴로 희망을 얘기하다 떠났던 존 허가 불과 11일 만에 평생 잊지 못할 첫 우승의 주인공으로 나타났다. 27일 멕시코에서 끝난 PGA투어 마야코바 클래식에서 우승한 그는 자신이 이룬 현실이 믿어지지 않는 듯 무표정했다. 중계 카메라에 소감을 밝히면서 비로소 울먹거렸다. “이 기쁨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본보 17일자 A26면 ‘필드의 저니맨’ 거침없이 굿샷∼

2010년 신한동해오픈에 출전했던 존 허(왼쪽)와 캐디로 나선 아버지 허옥식 씨. 한국프로골프투어(KGT) 제공
2010년 신한동해오픈에 출전했던 존 허(왼쪽)와 캐디로 나선 아버지 허옥식 씨. 한국프로골프투어(KGT) 제공
이날 존 허는 선두에게 7타 뒤진 공동 13위로 출발했다. 우승은 기대하기 힘들었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도 PGA투어 사상 두 번째로 긴 8차 연장 끝에 찾아왔다. 그만큼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약관을 겨우 넘겼을 뿐인 그의 골프 인생도 그랬다. 외롭고 힘들었지만 그의 곁에는 아버지 허옥식 씨(60)가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집에서 TV 중계가 되지 않아 인터넷 문자 중계로 초조하게 경기 결과를 지켜보던 허 씨는 우승이 확정된 순간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풀시드가 없는 대기선수로 대회가 열리는 미국 전역은 물론이고 인근 외국으로 떠돌아 다녀야 하는 ‘필드의 저니맨’이 이룬 쾌거이기에 더욱 값진 우승이다.

존 허는 1990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생후 3개월 만에 부모님, 네 살 위 형과 서울로 돌아왔다. 아버지 허 씨는 동대문시장에서 원단과 의류 사업을 했다. 단란한 가정에서 존 허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골프를 시작했지만 이런 여유는 오래가지 않았다. 외환위기에 휘말려 사업 실패에 보증까지 잘못 선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시카고로 떠났다. 허 씨는 골프에 막 재미를 붙인 아들을 위해 춥고 바람이 많이 부는 시카고를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옮겼다. 국내 사업을 위해 영주권을 반납했던 그는 불법체류라는 불안한 신분에도 식당과 슈퍼마켓 등에서 온갖 허드렛일에 막노동까지 하며 뒷바라지를 했다. 존 허도 연습장에서 공을 줍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운동에 매달렸다.

허 씨는 “찬수가 놀이동산에서 인형 맞히기 사격을 하면 백발백중이었다. 힘도 장사라 또래 친구 몇 명이 밀어야 움직일 정도였다”고 떠올렸다. 타고난 운동감각에 골프 유망주로 주목받은 존 허는 2008년 노스리지 캘리포니아주립대에 입학했지만 두 달 만에 자퇴한 뒤 프로의 길을 선택했다.

이듬해 존 허는 한국프로골프투어 외국인 프로테스트에 응시해 합격한 뒤 지난해까지 3년 동안 국내에서 뛰며 2010년 신한동해오픈에서 자신의 롤 모델이었던 ‘탱크’ 최경주를 꺾고 역전우승을 차지하며 비로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코리안 드림’도 쉽지 않았다. 변변한 수입이 없어 서울 강북에서 경기 성남시 분당의 연습장까지 캐디백을 든 채 전철과 버스를 타고 다녔다.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지만 나도 출근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버텼어요.” 경기 광주시의 33m²(약 10평) 규모의 월세 40만 원짜리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 허 씨는 “티셔츠가 별로 없어 자주 빨래를 했다. 주말골퍼 사이에 끼여 연습라운드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경비를 아끼려고 캐디로도 나선 아버지에게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2009년 삼성베네스트오픈 때 캐디를 하다 너무 힘들어 카트를 탔다 2벌타를 받았다. 대회 도중 스프링클러를 잘못 밟아 오른쪽 발목을 다친 적도 있다.

지난해 존 허는 PGA투어 퀄리파잉스쿨에 응시해 최종 라운드 마지막 홀 보기로 27위가 돼 25위까지 주어지는 합격증을 날린 줄 알았다. 하지만 3시간을 기다리다 앞선 두 명이 다른 자격으로 빠지게 돼 막차로 합격한 뒤 아버지와 포옹하며 기쁨을 나눴다. 존 허는 “OB 말뚝이 많고 산악 지형 코스가 많은 한국에서 티샷 정확도를 높인 덕분에 PGA투어에서도 잘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존 허의 올 시즌 PGA투어 드라이버샷 정확도는 69%로 9위이며 평균 타수는 2위(69.32타)다.

허 씨는 “고기도 한 번 제대로 못 먹었다는 얘기는 그만 써달라”며 웃었다. 존 허는 우승 상금 66만6000달러(약 7억5000만 원)를 받아 시즌 상금 104만 달러(약 11억8000만 원)로 상금 9위에 올랐다. 올 시즌 PGA투어 신인 중 최고. 거액을 보장받는 메인 스폰서십도 곧 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골프 스타를 꿈꾸며 태평양을 넘나든 아버지와 아들. 그들의 밝은 미래는 이제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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