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치, 그들을 말한다] 김정민 코치 “94년 LG 우승 때 안방마님은 나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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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26일 07시 00분


선수 시절 무명에 가까웠던 LG 김정민 배터리 코치는 성실함과 겸손함을 ‘무기’ 삼아 선수들의 신망을 얻는 지도자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그의 겸허함이야 말로 현재의 LG에 가장 필요한 미덕일지 모른다. 사진제공|LG 트윈스
선수 시절 무명에 가까웠던 LG 김정민 배터리 코치는 성실함과 겸손함을 ‘무기’ 삼아 선수들의 신망을 얻는 지도자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그의 겸허함이야 말로 현재의 LG에 가장 필요한 미덕일지 모른다. 사진제공|LG 트윈스
3. LG 김정민 배터리 코치

선수 시절 무명에 가까웠지만 겸손함이 무기
젊었을땐 떠나고 싶어했던 LG를 위해
이젠 새 안방 적임자 길러내는 중책 맡아


운동선수에 적합한 성격이 있긴 할까, 있다면 무엇일까?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의 열혈팬인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운동선수가 지녀야 할 덕목으로 ‘카티베리아’를 꼽는다. 우리말로 하자면 ‘악의’ 쯤이다. 사악함보다는 독기, 승부욕 같은 감정에 가까운 의미일 터다.

실제 취재를 해봐도 인간성과 운동능력은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실감할 때가 많다. 겸손함, 배려 같은 감정은 피도 눈물도 없이 명암이 갈려야 되는 승부의 세계에서 그다지 쓸모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자기가 직접 뛰는 쪽이 아니라 가르치는 쪽으로 ‘입장이 바뀌면’ 상황은 달라진다. 특히나 권위적 리더십보다 소통의 리더십에 마음을 여는 요즘 선수들에게는 ‘역지사지’를 할 줄 아는 지도자가 먹힌다. 김정민 배터리 코치(41)를 LG편 ‘코치를 말한다’ 첫 주자로 선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무명에 가까웠어도 겸손함을 말이 아닌 삶으로 실천한 선수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인터뷰 요청을 했을 때, 그의 첫마디는 “왜 저를 섭외하셨어요?”였다. 어쩌면 이런 겸허함이야말로 ‘지금 LG에 필요한 미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 천성

선수 김정민은 대전 가양초등학교 4학년 때 방과 후 클럽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원래 야구부가 없는 학교였는데 그 클럽이 어쩌다 정식 야구부로 변신했다. 졸지에 창단 멤버가 됐다. 시작부터 포수였다.

“포수는 힘이 들고, 돋보이지는 않으니까 다 안하려고 했는데 나는 오히려 그런 게 좋더라. 내 성격하고 맞았다. 주연 성향을 가진 친구는 포수를 맡기면 어려워하고 회의감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타석에서 삼진 3∼4개를 먹어도 팀이 이기면 기분 좋게 샤워하고, 농담할 수 있었다. 투수를, 동료를 빛내주는 조연이 더 좋았다.”

“감독님이 그냥 시켰다”고 그는 웃으며 돌이켰다. 다만 처음부터 미트질이 유달리 좋았던 기억은 있다. 아마시절 전국대회 우승, 국가대표도 다 해봤다. 천안북일고 2학년 때는 1년 선배 지연규(현 NC 코치)와 3관왕까지 해봤다.

● 설움

영남대를 졸업하고, 당시 포수가 약했던 삼성에 갈 줄 알았다. 언질도 받았다. 그러나 드래프트에서 그를 2차 1번으로 찍은 팀은 LG였다. LG는 김동수(현 넥센 코치)라는 확실한 포수가 있었다. 그러나 LG는 김동수의 군입대 공백을 메울 자원으로 김정민을 낙점한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잘 기억하지 못하지만 LG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던 1994년 김동수는 복무 중이었다. 당시 규정은 방위로 복무하면 홈경기는 뛸 수 있었다. 그래서 잠실경기만 김동수가 맡았고, 나머지 원정은 김정민이 주전 포수였다. 그렇게 LG는 정규시즌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태평양과 붙었던 한국시리즈가 되자 홈은 물론 인천 원정까지 김동수가 도맡았다. LG는 휴가를 내게 해서 3∼4차전을 뛰게 했고, 마지막 우승의 순간까지 누렸다. 그렇게 사람들은 김정민이 LG 우승 때 안방의 절반을 도맡았던 것을 망각했다.

그래도 버티면 자기 차례가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1998년에는 조인성이 영입됐다. 2인자는 1∼2군을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연패처럼 팀이 아주 어려울 때에만 기회가 주어졌다.

“재계약할 때마다 겨울에 제발 살 길 좀 열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구단입장을 보면 주전포수가 어찌될는지도 모르는데 놔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데 가면 길이 보이는데 답답하기도 하고. 1년 1년을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하다보니 오랜 시간이 지났다.”

인고의 생활은 끝이 안 보였다. 그러다 2군행 통보를 받으면 마음 줄을 놓게 된다. 내면에서 무너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2군에 가면 오히려 깨달음과 기운을 얻고 1군에 올라왔다. “전혀 이름도 모르는 어린 선수가 너무 열심히 하더라. 주전도 아닌데 행복하게, 즐겁게 표정도 너무 밝았다. 그걸 보며 스스로가 창피하기도 하고, 마음을 다잡았다.”

● 불운

그가 현역 기간을 통틀어 딱 한번 100경기 넘게 뛴 시즌이 있었다. 2000년이었다. 팀 성적도 좋았다. 다음 시즌 주전도 예약인 것 같았다. 그러나 2001년 SK와의 시즌 인천 개막전에서 홈 블로킹을 하다 강혁과 충돌했다. 엄지손가락이 골절됐다. 돌아와 보니 포수는 이제 조인성의 아성처럼 돼 있었다. 은퇴식까지 해놓고 복귀한 2009년 5월20일, 광주구장에서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리다가 아킬레스건을 다쳤다. 최초의 수술이었고, 그것이 김정민의 현역 마지막 경기가 됐다. “아쉬웠다. 단 1게임이라도 뛰어서 베테랑도 재활에 성공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선수를 그만둬서 아쉬운 것이 아니라 그것이 아쉽다.”

반전

김정민은 코치로 임용되기 전, 선수∼플레잉코치∼원정기록원∼전력분석원∼스카우트∼프런트를 두루 겪어봤다. 심지어 2006년에는 서용빈(현 LG코치)과 동반 은퇴식까지 치렀다가 다시 현역 복귀도 해봤다. 스카우트로서 뽑은 정찬헌 이범준 이형종과 같이 뛰기도 했다. 당시 LG 김재박 감독이 현역 복귀를 요청했을 때 당황했을 법도 하건만 그 자리에서 수락했다. “팀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하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LG는 김정민에게 잘해줘야 된다”고 곧잘 말한다. 그러나 당사자의 생각은 다르다. “나에게 LG는 젊었을 때는 떠나고 싶었던 곳이다. 그러나 LG에서 내가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다.”

코치로서 일한지 2년째, 2011년 겨울은 혹독하다. 조인성이 SK로 떠나 무주공산처럼 돼버린 LG의 안방을 책임질 선수를 키워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김 코치는 김태군 심광호와 신예 조현진을 언급했다. 이들 셋은 김 코치가 그토록 갈망했던 기회를 잡은 것이다. 샬리에르의 슬픔이 모차르트의 탄생을 빚어낸다면 그의 현역이 불운했다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는가.

● LG 김정민 배터리코치는?

▲ 1970년 3월15일생
▲ 대전가양초∼한밭중∼천안북일고∼영남대
▲ 1993년 LG 입단
▲ 2010년 LG 배터리 코치
▲ 연봉 5000만원
▲ 현역 통산성적 696경기 1443타석 1257타수 331안타 타율 0.263, 122득점 14홈런 142타점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트위터@matsri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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