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꿈을 향해 던지고 또 던지는 임·창·용

  • Array
  • 입력 2011년 2월 24일 03시 00분


코멘트

어제 가족 위해 던졌고… 오늘 팀을 위해 던지고…
내일 나를 위해 던진다…

야쿠르트 임창용(왼쪽)은 일본에 진출한 2008년부터 3년간 96세이브를 올리며 지난해 말 3년간 연봉 총 15억 엔(약 205억 원)의 대박 계약을 했다. 최근 일본 오키나와 우라소에에서 시즌 준비에 한창인 임창용을 동아일보 이헌재 기자가 인터뷰하고 있다. 야쿠르트 제공
야쿠르트 임창용(왼쪽)은 일본에 진출한 2008년부터 3년간 96세이브를 올리며 지난해 말 3년간 연봉 총 15억 엔(약 205억 원)의 대박 계약을 했다. 최근 일본 오키나와 우라소에에서 시즌 준비에 한창인 임창용을 동아일보 이헌재 기자가 인터뷰하고 있다. 야쿠르트 제공
《5남매가 단칸방에서 살던 때가 있었다. 없는 살림에도 부모님은 보약을 지어 야구선수인 막내에게만 먹였다. 가족 중 집에서 우유를 먹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야구 회비를 낼 돈이 없어 도망을 다니곤 했던 그는 요즘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가 됐다. 야쿠르트 수호신 임창용(35) 얘기다. 그는 올해 국내와 해외를 통틀어 한국 야구선수 가운데 가장 많은 돈을 받는다. 지난 3년간 96세이브를 올린 덕분에 지난해 말 야쿠르트와 3년간 15억 엔(약 205억 원)의 대형 계약을 했다. 임창용의 성공 스토리는 한 편의 드라마다. 21일 스프링캠프가 한창인 일본 오키나와 우라소에 시민구장에서 만난 그는 “내 야구 인생의 완결편은 메이저리그가 될 것이다. 야쿠르트와의 계약이 끝난 뒤 어릴 때부터의 꿈인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고 말했다.》

○야구가 즐거웠던 해태 시절

임창용은 고등학생 때까지 뛰어난 선수가 아니었다. 운동부 특유의 억압적인 분위기를 싫어했다. 그는 “내가 가장 위였던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 등 딱 3년만 열심히 한 것 같다”고 했다. 뛰어난 야구 재능을 가진 그에겐 그걸로 충분했다.

임창용은 1995년 해태에 입단한 뒤의 4년간을 가장 행복한 시간으로 기억했다. 그가 자신 있게 던지는 공은 직구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누구도 그의 공을 제대로 치지 못했다. 움직임을 예측할 수 없는 일명 ‘뱀 직구’였기 때문이다. 임창용은 “그냥 포수 미트 한가운데만 보고 세게 던졌다. 그 공이 어떤 때는 몸쪽으로, 또 어떤 때는 바깥쪽으로 휘면서 스트라이크가 됐다. 정말 야구가 재미있는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 성공과 좌절이 교차한 삼성 시절

임창용은 1998년 방콕 아시아경기에 참가했다. 눈에 띄는 활약은 없었다. 금메달이 확정되자 기자들은 그에게 몰렸다. 그가 양준혁 황두성 곽채진 등 선수 3명에 현금 20억 원을 더해 삼성으로 트레이드됐기 때문이었다.

팀을 옮겼지만 구위는 여전했다. 1999년 38세이브에 평균자책 2.12로 두 부문 타이틀을 차지했다. 2001년 선발로 전환한 뒤에는 3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를 거뒀다. 선발을 하면서 슬라이더와 체인지업 등 새 구종을 배웠다.

2004년 시즌 직후 그는 자유계약선수(FA)가 됐다. 어릴 적 꿈이었던 메이저리그와 일본프로야구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는 “해외 진출이 물 건너가면서 모든 의욕을 잃었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고 했다. 2005년에는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까지 받았다. 그의 선수 생명은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다.

○ 제2의 전성기 야쿠르트 시절

박화용 스포츠동아 기자 inphoto@donga.com
박화용 스포츠동아 기자 inphoto@donga.com
2007시즌 후 그는 삼성을 떠나 야쿠르트에 입단했다. 보장된 연봉은 단돈 30만 달러(약 4억 원). 하지만 새로운 환경에서의 야구가 그의 의욕을 일깨웠다. 2005년 수술을 한 뒤 세월을 허비한 것만은 아니었다. 공을 던지진 않았지만 야구를 보는 눈이 생겼다. 그는 “바둑이나 장기도 훈수 둘 때 더 잘 보인다고 하지 않나. 한발 떨어져서 보니 야구의 흐름이 보였다”고 말했다.

일본에서의 성공비결은 바로 ‘3단 투구’였다. 원래 사이드암스로인 임창용이지만 일본에서는 오버스로나 스리쿼터로도 공을 던진다. 이 역시 수술 후 재활을 하면서 꾸준히 익혀왔던 그만의 투구 동작이다.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최고 시속 160km의 빠른 공이 어느 높이에서 어떻게 날아올지 모르니 일본 타자들이 당황한 것은 당연했다. 경험이 쌓이면서 불안했던 제구력도 좋아졌다. ‘언터처블’의 신화가 일본에서 재현된 것이다.

지난해 시즌이 끝난 뒤 여러 팀에서 그를 잡기 위해 거액을 제안했다. 부자 구단인 요미우리도 뛰어들었다. 야쿠르트가 제시한 금액보다 훨씬 더 많다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그는 야쿠르트 잔류를 택했다. 그는 “야쿠르트는 내가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 준 구단이다. 돈도 중요하지만 가족 같은 분위기의 야쿠르트에서 뛰고 싶었다”고 했다. 이어 “우리 팀의 전력이 그 어느 때보다 좋다. 1, 2년 안에 우승할 수 있다. 나도 힘을 보태 팀을 우승시킨 뒤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고 싶다”고 말했다.

○ 꿈의 완결판인 메이저리그

메이저리그는 그에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이었다. 해외 진출 FA 자격을 얻은 2002년 그는 메이저리그 진출을 타진했다. 포스팅 시스템에서 메이저리그의 한 구단이 그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응찰액은 겨우 65만 달러(약 7억3000만 원)였다. 완전한 FA가 된 2007년 직후 다시 한 번 도전했을 때도 눈길을 준 구단은 없었다.

하지만 지난 시즌이 끝나자 분위기는 달랐다. 야쿠르트를 선택하긴 했지만 그에게 관심을 나타낸 구단이 세 팀 이상 됐다. 아메리칸리그의 한 명문팀은 3년간 2000만 달러 이상의 거액을 제시하기도 했다. 임창용은 오히려 이를 거절했다. 그는 “고민은 됐지만 아직 일본에서 할 일이 남았다고 생각했다. 야쿠르트와의 계약은 2+1 계약이라 2년 후 내가 원하면 메이저리그에 갈 수 있다. 그때까지도 잘 던질 자신이 있다. 단지 시기를 늦추는 것뿐”이라고 했다.

2년 뒤 야쿠르트 잔류를 택하면 그는 여전히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메이저리그에서의 조건은 지난해보다 크게 떨어질 수도 있다. 임창용은 “2년 후에는 돈에 구애받지 않고 미국으로 갈 생각이다. 생활비만 나오면 된다(웃음). 미국에 가서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임창용의 드라마는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될 수 있을까.

우라소에=이헌재 기자 uni@donga.com


▲야쿠르트 임창용 "한국 선수들과는 상대하기 싫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