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L직행…특급투수…추락…부활 ‘영욕 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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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23일 21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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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국 인터뷰로 본 박찬호 MLB 16년
94년 한국인 첫 MLB 입단
97년부터 선발투수 승승장구
2000년 亞투수 최다 18승
FA대박으로 부-명예 획득
2002년 텍사스이적후 긴 부진
올해 중간계투로 마침내 재기

"WBC도 잘하고 정규시즌에서도 둘 다 잘할 자신이 없다. 앞으로 태극마크를 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필라델피아에서 예정됐던 입단 기자회견이 동료 선수의 약물 복용 혐의가 터지면서 취소됐다. 지금 내 위치가 이런 거구나 싶어 서운했다."(2009년 1월 13일)
"내년에 선발로 뛸 수 있는 있는 곳, 이왕이면 월드시리즈에 나갈 수 있는 팀에서 뛰고 싶다. 구단이 재계약을 하고 싶어 한다는 말을 들었다. 필라델피아가 아니더라도 다른 팀에서 연락 올 거란 자신감이 있다."(2009년 11월 10일)
박찬호(36·필라델피아)는 10일 귀국 기자회견에서 연신 웃음을 지었다. 추신수(클리블랜드)에게 아들 낳는 비법을 물어봤다는 농담도 던지는 등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열 달 전 그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출전 여부를 놓고 팬들의 관심이 쏠리자 급히 귀국해 가진 기자 회견장에서 눈물을 펑펑 쏟았다.
1994년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박찬호는 매년 시즌이 끝나면 고국을 찾았다. 세계 최고 야구 무대에 코리안 루트를 뚫은 개척자의 방문은 늘 화제였다. 그의 입국 당시 상황과 표정은 다양했다. 올해 1월 서러움의 눈물이 11월 여유로운 미소로 바뀌었듯 박찬호의 귀국 기자회견은 그의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했다.
박찬호는 1994년 LA 다저스 입단 후 메이저리그 직행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2경기 만에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1994~1995년을 주로 마이너리그에서 보낸 그는 연말이면 한국에 왔지만 큰 이슈는 아니었다. 조용히 고향으로 내려가 휴식을 취하는 게 일정의 대부분이었다. 그가 1996년 5승(5패)을 거두며 가능성을 보인 뒤 귀국했을 때는 야구팬과 언론의 관심은 늘어났다.
1997년에는 그야말로 호떡집에 불난 듯했다. 풀타임 메이저리거로 활약하며 14승(8패)을 거둔 박찬호는 영웅이었다. 11월 11일 고국 땅을 밟은 그를 보기 위해 공항에는 환영 인파가 몰렸고 공항은 물론 그가 묶는 호텔에는 전담 경호팀이 가동됐다. 그는 20일 동안 한국에 머무르면서 청와대를 방문하고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1998년 15승(9패)을 올린 그는 방콕 아시아경기 대표팀에 뽑힌 뒤 10월 귀국해 "금메달 외에는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며 각오를 다졌다. 대표팀의 금메달을 이끈 이듬해인 1999년 그는 13승(11패)을 수확했다. 2000년에는 당시 아시아 투수 최다승 기록인 18승(11패)을 올려 특급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열띤 취재 경쟁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20승'과 '월드시리즈 출전' 등의 목표를 자신 있게 얘기했다.
하지만 그는 2002년 다년 계약 대박을 터뜨리며 텍사스로 이적한 뒤부터 부진에 빠졌다. 부상에 발목 잡힌 그는 2003년 1승, 2004년 4승에 그쳤다. 시즌 종료 후 한국을 찾았지만 "팬들께 죄송하다"는 사과부터 건넸다. 1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친 2007년에는 처음으로 극비 귀국하기도 했다.
박찬호가 내년에 몸담을 팀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선발로 뛸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1년 후 박찬호는 어떤 표정으로 고국 팬들을 만날까. 그는 올해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출전했다. 하지만 '시즌 20승' 목표는 '동양인 투수 최다승'으로 목표를 수정해야 할 듯하다. 박찬호는 4승만 보태면 노모 히데오(일본)가 기록한 123승을 넘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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