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볼 피플] 양현종, 광현 보며 자극…“이젠 내가 주인공”

  • 입력 2009년 6월 10일 08시 31분


‘방어율 1위’ KIA 에이스 부상 양/현/종

지난 2년 1군 79경기서 1승7패 초라한 성적

임태훈 등 잘나가는 동기들 보면서 오기 발동

“올핸 5승이상 풀타임” 다이어리에 굳은 다짐

2009년 1월 1일, 그는 다이어리에 새해 목표를 이렇게 적었다. ‘5승 이상 하기. 1군에서 풀타임 뛰기. 팀 한국시리즈 올라가기. 어린 티 내지 않기. 화나면 화내기. 유니폼 입고 있는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기. KBO에 내 기록 남기기. 남자다워지기. 독해지기. 야구 잘해 인터뷰 많이 하기.’

분신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는 다이어리를 쑥스럽게 보여주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올해는 진짜 야구 잘 하고 싶고, 잘 할 것이다.”

KIA 양현종(21). 9일 현재 올 시즌 11게임에 선발등판, 5승2패. 무엇보다 방어율 2.13의 ‘짠물투구’로 이 부문 1위를 달리며 야구팬들 사이에 양현종이란 이름 석자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고 있다.

신인이던 2007년 승 없이 5패, 지난해 1승2패 등 2년간 1군 79게임에서 방어율 5.17을 기록했던 사실을 떠올리면 믿기 힘들 정도. 올 시즌 ‘투수왕국’ KIA 마운드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그를 광주에서 만났다.

○누나하고 놀지 말라

야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학강초등학교 시절. 육상선수 출신의 아버지는 ‘누나들하고 놀지 말라’고 했다. 위로 누나만 둘 있는 양현종이 여리고 여성스러워질까 우려해서였다. 앳된 외모에 안경까지 쓴 탓에 ‘약해 보인다’란 말을 가끔 듣는 그가 다이어리에 ‘남자다워지기, 독해지기, 화나면 화내기’라고 쓴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선발등판할 때는 아직도 외롭다. 혼자 따로 몸 풀고, 홀로 준비하는 게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차차 익숙해지고 있다”는 그는 다이어리에 적은 각오대로 점점 더 독해지고, 강해지고 있다.

○사랑을 먹고 크다

지난해까지 그는 가능성은 있었지만 그렇게 빼어난 투수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조범현 감독은 적잖은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양현종을 지난 시즌 1군 엔트리에서 한번도 제외하지 않았다.

“내 스스로 ‘이러다 2군에 가겠구나’ 생각할 때도 감독님은 그냥 놔두셨다. 처음엔 그 의미를 몰랐는데 이제야 알 것 같다.”

지난 1년 경험은 그에게 큰 재산이 됐다. 마운드에서 자신감과 여유를 갖게 됐다.

“수많은 관중 앞에서도 던졌고, 패전투수도, 1점차 상황에서도 던져봤다. 투수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다 해봤고 그 경험이 올 시즌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게 양현종의 말이다.

○자극이 된 친구들

동성고 2학년 시절 1년 선배 한기주와 함께 ‘원투펀치’를 이뤘던 그는 묵직한 직구를 앞세워 대통령배에서 우수투수상을 받는 등 제법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그러나 프로 데뷔 후 이렇다하게 주목을 끌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일이지만 ‘프로 유니폼을 입는 게 꿈’이었던 그는 또 다른 꿈을 찾지 못했다.

김광현(SK) 임태훈(두산) 등 2006년 쿠바 세계청소년대회 우승 때 함께 뛰었던 친구들이 일찌감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때. 그는 먼저 휴대폰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멋있다. 축하한다’고. 그러면 친구들은 고맙게도 “너도 얼른 야구 잘 해서 같이 웃자”고 했다. 잘 나가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움이 생겼고, ‘나는 왜 이러고 있을까’란 아쉬움도 커져갔다.

○가슴에 남은 선배의 말 한마디

지난해 시즌이 끝난 뒤 가진 팀 회식 자리. 포수 김상훈은 지나가는 말로 그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우리가 올해 6위밖에 못한 건 네가 못해서다.” 더 열심히 하라는, 큰 의미 없는 말이었지만 하늘 같이 따르는 선배의 말 한마디는 그의 가슴에 깊이 남았다. “내가 우리 팀에서 이 정도구나,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팀에서 꼭 필요한 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고마운 ‘괌 관광객’

마음을 다 잡고 야심차게 시작한 올 스프링캠프. 열심히 했건만 이상하게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보다 못한 조범현 감독은 결국 채찍을 들었다. ‘짐을 싸 돌아가라’는 날벼락. 그날이 마침 설날이었다. ‘광주로 돌아가면 트레이드 될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밀려올 때, 매니저는 운 좋다는 듯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 표가 없단다.” 아마 그 때 귀국했더라면 지금같은 모습은 없을 것이란 게 그의 생각. “괌 관광객들에게 정말 고맙다. 운 좋게 살아남은 뒤 죽을 각오로 열심히 했다.”

이 악물고 하체 훈련하자 변화구가 자유자재

벌써 5승 “이젠 두자리 승…후회없이 던진다”

○변화구, 그 맛을 알다

그는 지난해까지 ‘직구 투수’였다. 들쑥날쑥한 변화구는 자신도 믿지 못했다. 직구밖에 던질 줄 모르니 타자들도 그를 쉽게 공략했다.

그러나 지난 시즌, 마운드에 오른 날이면 어김없이 투수코치, 트레이너와 함께 하체 밸런스를 잡는 운동을 2시간씩 꼬박꼬박 했다. 원정이든 홈이든 상관없이 앞으로 쏠리는 하체를 뒤로 잡아주는 반복 훈련을 했고, 하체 밸런스가 잡히면서 변화구를 마음먹은 대로 뿌리게 됐다.

○1년 뒤 후회 없이 웃기

올 시즌 2번째 선발등판이었던 4월 12일 광주 삼성전. 8이닝 무실점으로 첫 승을 기록한 그날, 가장 기뻤던 건 4사구가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 제구력에 완전히 자신감을 갖게 됐고, 그날 이후 ‘직구 던지면 맞을 것 같고, 변화구는 던지질 못했던’ 양현종은 더 이상 없었다.

1월 1일 다이어리에 ‘5승 이상 하기’라고 적었던 그는 이제 두자리 승수를 목표로 삼는다.

“이 정도 성적이 나올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며 미소를 짓는 그는 삼진을 많이 잡아 자신의 우상인 ‘갈기머리’ 이상훈(전 LG·SK)처럼 언젠가 멋진 세리머니를 해보고 싶다는 또 다른 꿈도 털어놨다.

1월 1일, 그가 다이어리에 적은 목표의 맨 마지막 줄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다. ‘1년 뒤에 이거 보고 후회 없이 웃기.’

광주 |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일러스트|박은경 기자 parkek4114@donga.com

[화보]스타 탄생 ‘150km 좌완 광속구’ KIA 양현종

[관련기사]‘복덩이’ 홍상삼 뜨면 곰이 춤춘다

[관련기사]서-장 컴백…호랑이 날개 달았다

[관련기사]뛰고 싶은 고영민 “감독님 저 다 나았어요”

[관련기사]임태훈 “찬호 선배 빨리 살아나야하는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