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BC가 남긴 9가지 뒷얘기

  • 동아닷컴
  • 입력 2009년 3월 27일 07시 49분


제 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의 축제가 끝났습니다. 태극전사들은 국민들을 울고 웃겼습니다.

야구는 단순한 스포츠의 의미를 넘어 국민과 국민을 연결해주고, 경기침체로 힘겨워하는 대한민국에 목표를 갖고 뛰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줬지요.

2009년 3월, 그 신화의 순간순간과 마디마디는 우리들 머리와 가슴에 영원히 기억될 듯합니다.

그러나 태극전사들이 써내려온 3월의 전설 속에는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도 무성했는데요, WBC를 취재하면서 소개하지 못하고 넘어간 재미있는 일화를 추려봤습니다.

1. 정현욱 “‘벼락스타’로 떴어요”



이번 대회에서 많은 선수들이 국민적 스타가 됐지만 삼성 정현욱은 그야말로 ‘벼락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최종 엔트리를 추릴 때 탈락 1순위로 꼽히던 투수가 대표팀 마운드의 큰일꾼으로 맹활약했으니까요. 만약 그가 엔트리에서 빠졌더라면 어쩔 뻔했습니까.

지난해 삼성에서 시도 때도 없이 마운드에 올라 팀 마운드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해내 ‘정노예’로 불리던 그의 신분도 당장 ‘국민노예’로 격상된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렇다보니 동네에서도 난리가 난 모양입니다. 그의 아내에게 사인볼 좀 달라고 아파트 주민들이 줄을 섰다고 하네요.

국제전화를 통해 그 얘기를 전해들은 정현욱은 믿어지지 않는 표정이더라고요. “그 동안 내가 야구선수인지 알아보는 사람은 동네 슈퍼마켓 주인밖에 없었다”며 웃더군요.

주민들이 뒤늦게 정현욱이 같은 아파트 주민이라는 걸 안 모양입니다.

2. 무뚝뚝한 공항입국심사대 직원도 환호성



해외여행이나 업무로 공항 입국 심사대를 통과해본 사람들은 모두 아시겠지만 심사관들이 참 무뚝뚝하잖아요. 무표정한 표정으로 여권을 훑어보고 도장을 찍어주지요.

가끔은 그들이 의심쩍은 표정으로 질문을 할 때면 여행객으로서는 아무 잘못도 없지만 ‘혹시 뭐가 잘못 됐나’ 싶어 가슴을 졸이기도 하지요. 표정 하나만으로도 위압감이 느껴지죠.

대표팀 선수들이 전세기를 타고 입국한 25일 밤이었습니다.

이미 모든 항공 스케줄이 끝나 대표팀 선수와 관계자들만 입국했는데 입국심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습니다. 그들도 대한민국 국민들이었습니다.

한 심사관이 “내 앞으로 김태균이 지나갔다”고 옆 심사관에게 자랑을 하자 “여기로 이범호가 지나갔다”며 속삭였습니다. 공항의 다른 여직원들은 기념촬영이나 사인을 요청한 뒤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르더군요.

선수들은 국내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사실을 실감했습니다. 현지에서는 이렇게까지 열기가 뜨거울지는 잘 몰랐거든요.

3. 양상문 코치까지 선수 사인볼 받아

선수들은 여기저기 사인요청으로 몸살을 앓았는데요. 코치들이 선수들에게 사인을 받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양상문 투수코치(롯데 2군 감독)은 LA에서 출국하기 전 호텔 로비에서 공에 선수들 사인을 받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사실 코치가 제자에게 사인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쑥스럽겠습니까. 그것도 기자들까지 옆에 있었으니까요.

양 코치는 겸연쩍게 웃으며 “군대간 조카가 부탁해서…”라고 머리를 긁적거리더군요. 전우들이 양 코치의 조카라는 사실을 알고는 사인볼을 부탁했던 모양입니다.

양 코치는 “사인볼 주면 조카 군생활이 조금 편하지 않겠나”라며 웃더군요. 대한민국 방방곡곡이 야구 열기에 휩싸인 모양입니다.

4. 타국서 치뤄진 신영철 SK사장의 생일상

대표팀을 응원하기 위해 한국야구위원회(KBO) 유영구 총재를 비롯해 6개구단 사장(삼성 히어로즈 제외)들이 현지까지 날아와 응원을 했는데요.

마침 결승전이 벌어진 24일이 SK 신영철 사장의 생일이었습니다.

이날 아침에 유 총재가 직접 케이크를 준비해 사장단과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불렀고, 신 사장은 이국에서 케이크의 생일 촛불을 껐습니다.

이날 점심 때 한국 기자들도 이날이 신 사장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전해듣고 모두 축하해줬지요. “아무래도 대표팀이 최고의 선물을 해줄 것 같다”면서요.

결국 우승이 아닌 준우승에 그쳤지만 신 사장은 “생일상을 밖에서 받은 적이 거의 없는데 우리 대표팀 선수들이 내 생애 최고의 생일선물을 해줬다”고 감격해했습니다.

대표팀이 최선을 다하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했다고 하네요. 신 사장은 “1등보다 나은 2등이다”며 대표팀에 고마운 마음을 전했습니다.

5. “집에 가고 싶다” 대표팀 이구동성

대표팀의 선전에 대한민국이 행복했지만 선수단은 그야말로 힘든 여정이었습니다.

김인식 감독은 “1월 15일에 한화 하와이 전지훈련을 시작했으니 집에 들어간 것도 두 달이 넘었다”며 한숨을 내쉬더군요.

몸도 불편한 데다 대표팀까지 맡아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프로야구에 종사하는 코칭스태프와 선수들은 매년 장기간 해외 전지훈련을 하지만 70일이 넘는 경우는 보기 드물죠. 보통 길다고 해도 50여일이면 캠프가 끝나니까요.

김 감독 뿐만 아니었습니다. SK 박경완은 “우리는 1월 9일부터 일본에서 캠프를 시작했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군요. 대부분의 선수들이 “집에서 따뜻한 밥을 먹어보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대표팀을 지원한 KBO 직원들도 “가족들이 보고싶다”며 귀국날짜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6. 잠못 이룬 김인식 감독



비록 준우승에 그쳤지만 우리 선수들의 투혼은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래도 결승전에서 가장 아쉬웠던 장면은 역시 임창용이 연장 10회에 이치로와 정면승부를 하다 결승 안타를 내준 대목이겠죠.

김 감독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포수 강민호에게 일어서서 고의4구로 거르지는 않더라도 볼로 승부하라고 했는데 전달이 잘 안됐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러면서 외신기자들이 그 부분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자 설명을 했는데 그것이 어떻게 보면 선수를 비난하는 것처럼 비쳐지는 것 같았는지 김 감독은 “언론에서 창용이에게 뭐라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강민호야 롯데에 돌아가면 동료들도 한국선수들이라 적응을 하겠지만 창용이는 일본에서 혼자 외롭게 야구를 해야하는 선수 아니냐. 충격이 클 것인데 그게 자꾸 머리에 남으면 일본에서 뛰는 데 지장이 있지 않겠느냐”며 감싸더군요.

그러면서도 “내 잘못이다. 후회된다. 밤에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결승까지 진출한 것만 해도 잘 한 일이지만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정상의 기회를 놓쳐 계속 머리에 남았던 모양입니다. 국민들도 안타까워했지만 감독이나 당사자들이야 오죽했겠습니까.

7. 김인식 감독 “선수들 휴식 좀 줬으면…”

대표팀 선수들은 귀국하면 각자 소속팀으로 합류하게 되죠.

김인식 감독은 25일 귀국하는 길에 일본 나리타 공항에서 “한화 선수들에는 이틀간 휴가를 줬다”고 말하더군요. 다음주에 당장 시즌 개막이지만 선수들이 곧바로 팀에 합류해 시범경기에 나서는 것보다 휴식이 더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지요.

그런데 김 감독은 다른 팀 선수들이 걱정이었나 봅니다. 대표팀에서는 자신이 직접 데리고 있었지만 각자 소속팀으로 흩어지고 나면 자신이 챙길 수 없으니 사실 남이 되는 운명이죠.

김 감독은 일부 선수들이 “곧바로 시범경기가 열리는 팀에 가야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시대가 많이 변했잖아. 선수들을 무조건 옥죄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다른 팀들도 모두 대표팀 선수들에게 휴식을 줬으면 좋겠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소속팀에서 결정할 일이지만 김 감독으로서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선수들이 안쓰러웠나 봅니다.

8. 청와대 방문을 두고

25일 이명박 대통령이 대표팀 선수단을 청와대로 초청했지요.

선수단은 25일 LA에서 출발해 일본 나리타 공항에 잠시 내렸을 때 청와대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반응들이 제 각각이었습니다. 극도의 피로에 지친 선수 중에는 “한국에 도착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대표팀 일정은 언제 끝나는 거냐”며 울상을 짓기도 했고, “청와대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번 보고싶었다”며 좋아하는 선수도 있었습니다.

지난해 베이징올림픽 멤버들은 이번이 두 번째 청와대 방문이지요. 입담꾼 이진영은 “평생 청와대에 들어갈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왜 이리 자주 가는거야”라면서 “마치 앞집 드나들 듯 청와대에 가본다”며 너스레를 떨어 배꼽을 잡게 만들었습니다.

이순철 타격코치는 “84년 LA 올림픽 때 가 보고 25년 만에 청와대를 방문하게 됐다”면서 “당시에는 야구가 시범종목이어서 들러리로 갔는데 이번에는 주인공이 됐다”며 감회에 젖더군요.

9. 봉중근 “현수막이 없어졌네”



봉중근은 이번 WBC에서 최고의 영웅 중 한명이죠. 9일 1라운드 1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꺾는 데 일등공신이 된 그에게 ‘의사 봉중근’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잖습니까.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동부이촌동의 아파트 주민들은 플래카드까지 내걸고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했지요. 봉중근은 “인터넷을 통해 스포츠동아에 사진과 기사가 실린 것을 봤다”고 하더군요.

25일 밤 귀국한 그는 아파트 앞에 걸려있을 플래카드를 상상하며 집으로 갔는데 약간 실망을 했다고 합니다.

대회가 끝나서였는지 그 플래카드가 철거되고 없더라고 하네요. 플래카드가 대수입니까. 이제 봉중근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는 국민이 없으니 말입니다.

이재국기자 keystone@donga.com

사진=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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