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L선 영어가 무기, 감독도 선수도 예외는 없다

  • 입력 2008년 11월 6일 09시 07분


2005년 8월 9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프레스룸은 한국기자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로 PSV에인트호벤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 퍼거슨의 마음을 사로잡은 박지성이 세계 최고 명문 클럽 맨유에서 데뷔전을 가진 날이기 때문이다.

평소 프리미어리그(EPL) 경기에는 기자회견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퍼거슨이지만 이날 경기는 기자회견이 의무사항으로 돼 있는 헝가리 클럽 데브레첸과의 챔피언스리그 예선전으로, 올드 트래포드에 첫 선을 보인 박지성에 대한 퍼거슨의 코멘트를 들을 수 있는 많지 않은 기회여서 프레스룸은 기자들로 넘쳐났다.

호날두, 루니, 반 니스텔루이의 골로 3-0 손쉬운 승리를 거둬 환한 표정으로 프레스룸에 들어선 퍼거슨에게 한국 기자 한 명이 질문을 던졌다. “오늘 첫 출장한 박지성의 활약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해 퍼거슨은 통상적인 칭찬 몇 마디를 던졌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글래스고 출신인 퍼거슨이 쓰는 강한 스코티시 악센트의 영어를 한국기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기자들이 반복해서 박지성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자 부드러운 얼굴로 들어선 퍼거슨은 평소처럼 영화 스타워즈에 나오는 ‘악의 화신’ 다스 베이더로 변해 가고 있었다. 자신의 영어를 잘 못 알아듣는 기자들로 인해 당황한 퍼거슨은 가장 완벽한 영어는 스코틀랜드에 있다는 말을 아느냐며 다음과 같이 조크를 던졌다.

“만일 당신이 단 하루라도 인버네스에 간다면 당신은 완벽한 영어를 어떻게 말하는지를 배우게 될 겁니다.”

1998년부터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서 맨유를 전담 취재해온 다니엘 테일러 기자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 딱한 한국기자들은 퍼거슨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손하게 미소를 띠고 머리를 숙여 인사하며 고맙다는 말만 연신했다.”

스코틀랜드에서도 가장 강한 악센트를 쓰는 글래스고 영어를 하는 퍼거슨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기자들에 무안해서 다소 반어적인 농담을 던진 이 일화는 퍼거슨도 자신의 영어에 어느 정도 열등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어는 EPL 성공의 열쇠 중 하나

얼마 전 미 LPGA에서 영어가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경기 출전을 제한하겠다고 해서 문제가 된 일이 있는데, 축구에서도 의사소통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기를 중계하며 나오는 지적 중에 적지 않은 것이 플레이어들 간의 의사소통 부족이며 선수들의 적응을 가로막는 장애물 중 하나가 언어장벽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EPL에서 영어는 비영어권 선수나 감독에게도 성공의 열쇠 중 하나이다.

요즘 라모스에서 레드냅으로 감독이 바뀌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는 토트넘에 대한 여러 분석이 있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영어를 통한 의사소통이 원활했는지 여부이다. 첼시와의 경기 후 프레스룸에 들어선 라모스 전 토트넘 감독은 시종일관 통역을 통한 기자회견을 한 반면 첼시의 스콜라리는 유창하지는 않지만 통역 없이 영어로 기자들의 질문에 직접 답변했다.

또한 경기 중에 경기가 잘 풀리지 않자 라모스는 선수에 대한 직접 지시보다는 벤치를 뒤돌아보며 하소연하는 소극적 모습으로 일관했다. 한 순간에도 경기의 흐름이 바뀌는 긴박한 상황에서 선수와 감독간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다면 머리와 팔다리가 엇박자를 내고 있다고 봐야한다. 설사 24시간 완벽한 통역을 대동한다 해도 직접 지시하는 것보다 나을 리 없다.

이는 마치 한국 시나 소설을 영어로 된 훌륭한 번역서로 읽는다 해도 그 의미가 완전히 전달되지 않는 것과 같다. 토트넘 선수들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은 것도 잉글랜드 출신인 레드냅 감독의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의사소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테베스의 약점도 영어?

빅4의 감독 중에 영어를 못하는 감독이 없다는 점이 우연이 아니다. 또한 감독의 출신 국가에 따라 같은 언어권의 코치진이나 선수들이 증가하는 것도 축구에서 의사소통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최근 베르바토프의 이적으로 경기 출전이 뜸한 맨유 테베스의 경우를 보자. 테베스는 퍼거슨이 다른 클럽으로 양보하고 싶지 않은 기량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공격진 로테이션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되었다.

퍼거슨이 주전출전을 보장한 호날두를 제외하고 베르바토프, 루니, 테베스의 로테이션에서 유독 테베스를 배제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새로 영입한 베르바토프의 최상의 조합을 찾기 위해 베르바토프를 중용한다는 것은 퍼거슨도 밝힌 바 있다. 퍼거슨은 최근 테베스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면서 테베스는 경기에 출전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다며 만족감을 드러낸바 있다. 그러면서 테베스와는 항상 언어문제가 있어 왔다는 점을 시인했다.

포르투갈어를 쓰는 스콜라리가 현 첼시 스쿼드에서 같은 언어권 선수가 8명이고 스페인 출신인 베니테스가 리버풀에 7명의 같은 언어권 선수를 두고 있는 것이 큰 기량 차가 아니라면 의사소통이 원활한 선수를 선호하는 매니저들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박지성을 비롯해 EPL 무대의 성공을 바라는 현재나 미래의 태극전사들도 유념할 대목이다.

요크(영국) | 전홍석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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