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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8월 12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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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올림픽 양궁 여자 단체전에서 한국의 6연속 우승을 이끈 문형철(50) 감독.
그는 10일 끝난 중국과의 결승에서 승리를 거둔 뒤 주현정(26), 윤옥희(23), 박성현(25)과 차례로 포옹하며 환하게 웃었다. 얼마 만에 지어보는 미소였을까.
지난해 1월 올림픽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그는 ‘여자 양궁은 금메달 보증수표’라는 주위의 기대가 워낙 컸기에 꼭 해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렸다. 만약 실패할 경우 돌아올 따가운 시선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런 그에게 지난해 12월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태릉선수촌에서 신체검사를 받은 뒤 ‘갑상샘암 3기’ 판정을 받았다. 평소 담배도 거의 피우지 않고 건강에는 누구보다 자신 있었기에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을까”라며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다행히 잘 치료하면 괜찮아질 것이란 소견을 듣고 올해 1월 서울 강남의 한 종합병원에서 수술을 한 뒤 몇 차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병원을 오가면서도 문 감독의 머릿속은 온통 올림픽을 향해 있었다.
“한국 양궁의 금메달 행진을 계승해야 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남은 항암 치료는 올림픽이 끝난 뒤로 미뤘습니다.”
매일 호르몬 성분의 약과 건강식품을 복용하고 있는 문 감독은 주위에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올림픽 준비에만 매달려 왔다.
그는 동료 지도자, 대한양궁협회와의 협력 속에 베이징 양궁장과 흡사하게 조성한 경기장에서의 모의 테스트, 소음과 미디어 대비 훈련 등을 통해 실전 감각을 끌어올렸다.
팀워크가 생명인 단체전에서 선수들이 최상의 호흡을 맞추는 데도 공을 들였다. 올림픽을 앞두고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 때는 특정 선수에게만 집중돼 다른 선수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염려해 모든 선수가 번갈아 할 수 있도록 유도했다.
단체전에서 세 선수의 발사 순서도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거쳐 선수들의 성격과 기량에 맞춘 최적의 조합을 마련했다. 당초 경험이 많은 박성현을 1번에, 주현정을 3번에 배치하기도 했으나 4월 월드컵에서 중국에 지면서 둘을 맞바꿔 효과를 봤다. 슈팅 타임이 빠른 주현정은 1번으로 나서 다른 선수들이 여유 있게 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고 마지막 주자로 나선 박성현은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으로 승리를 설거지했다.
지난달 “올림픽이 다가올수록 스트레스 강도가 심해진다. 잠도 잘 안 온다”며 말 못할 고충을 털어놓은 그는 오히려 어린 선수들 앞에서는 “우리는 세계 최강이다. 평소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 즐기면서 준비하자”고 다독거렸다.
영광스러운 올림픽 금메달을 따내며 지도자 인생의 화려한 꽃을 피웠지만 가족에게는 미안할 때가 많다.
전북 부안군이 고향인 문 감독은 부안농림고를 거쳐 삼익악기, 서울우유 등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이제는 ‘제2의 고향’이 된 경북 예천에서 1983년부터 지도자로 둥지를 틀었다. 예천군청팀을 이끌던 그는 군청 공무원이던 부인 전미연(46) 씨를 만나 1985년 영호남 커플로 결혼한 뒤 아직도 예천군청 관사에서 생활하며 소속팀 선수들과도 동고동락하고 있다. 선수 생활은 화려하진 않았지만 1989년 처음 대표팀 코치가 된 뒤 지도자로서는 명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2녀 1남을 둔 문 감독의 생일은 국내외에서 양궁대회가 집중적으로 열리는 음력 9월이기에 집에서 미역국을 먹은 경우는 결혼 후 23년 동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는 게 부인의 얘기. 대표팀 감독이 된 지난 20개월 동안 집에서 잠을 잔 시간은 한 달도 채 안된다고.
올림픽 단체전 금메달을 딴 뒤 집에 전화를 걸어 기쁨을 나눈 문 감독은 “가장으로서는 낙제점이지만 잘 이해해 줘 고맙다. 그 덕분에 이런 자리에 설 수 있었다”며 활짝 웃었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