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박영석의 인물스토리 3]내가 본 박영석

  • 입력 2004년 3월 26일 17시 27분


내가 '히말라야의 철인' 박 영석을 처음 대면한 때는 1997년이었다. 당시 내 눈에 박 영석은 마치 전설 속의 '설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세계 최초로 1년간 히말라야 8천 미터급 봉우리 6개를 등정한 때가 바로 그 무렵이었다. 당시 내 눈에 박 영석은 마치 앞산에 마실갔다 오는 것처럼 히말라야 자이언트 봉우리들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라곤 몇 달의 목숨을 건 등정이 끝나고 다음 원정을 준비하던 단 몇 주간뿐이다. 고산등반에 문외한이던 나는 몇 달에 한 번씩 새까만 얼굴에 수염이 덥수룩한 행려병자 같은 그를 보는 것이 그리 달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모습 뿐 아니라 행동에서도 이 사회의 범인들과 다른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몇 달에 한 번씩 한반도에 들리는 탓에 우선 서울 시내버스 요금은 물론 당연히 알아야 할 여러 일들에 대해 백치에 가까울 정도로 모르고 있었다. 혼자 놔두면 무슨 무장공비 잔당 취급을 받을지 모를 일이었다. 게다가 초겨울 날씨에도 덥다고 얼마나 땀을 흘리던지. 설산에서 그리 오래 지내다 보니 고향 기온이 어색해졌던 것이다.

"아, 또 해내셨네요, 축하합니다"라고 의례적인 인사를 몇 차례. 이렇게 뜬금없는 만남을 몇 차례 계속하다 보니 의문이 생겼다. 도대체 그는 왜 그토록 차가운 얼음산에 계속 오르려는 걸까? 자기가 무슨 시지프의 후예라도 되는 것일까? 산꼭대기로 돌을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스가 아니라면 매번 죽음의 문턱까지 가면서 그런 일을 계속해오는 것일까? 내 판단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산에 왜 올라가느냐?", "남극과 북극엔 왜 가려고 하느냐?는 우매한 질문에 단 한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해맑은 미소만이 메아리처럼 다가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가 직접 답해주지는 않았지만 그가 탐험에 나서는 이유를 자연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이 내면에 존재한 거짓 없는 마음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그에게 순수한 마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때는 그가 히말라야 8천미터 14좌 완등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순간이었다.

1998년 어느 날 박 영석이 언제나 그렇듯이 새까만 얼굴을 하고 "오랜 만이야"라는 인사를 건네며 나타났다. 시샤팡마를 등정하고 온 길이었다. 당시 산악계의 핫 이슈는 이른바 엉뚱한 산을 오르는 것. 세계 산악계는 진짜로 올랐느냐는 등정시비로 몸살을 앓았다. 몰론 이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악천후 때문에 벌어지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초등의 경우 해당 국가의 정보가 잘못돼 엉뚱한 산을 오르는 때도 있었다. 많은 등정시비 중에서도 등반자의 혼동이 많기로 유명한 곳이 바로 시샤팡마였다. 14좌로 인정받는 시샤팡마 주봉(8027m)과 중앙봉(8012m)의 차이는 불과 15m. 많은 산악인들이 중앙봉을 주봉으로 착각, 깃발을 꽂고 내려왔던 것이다.

박 영석도 바로 1년 전인 1998년 착각 속에서 그 중앙봉을 다녀왔다. 스폰서 등 외적 어려움과 또 죽음을 무릅쓰고 시샤팡마에 다녀왔는데 그것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와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는 원정이 끝난 뒤에는 항상 소주잔과 함께한다.

"주봉 맞던가요?"

"...."

"그럼 다시 해야죠?"

"그렇지."

이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그리고 박 영석은 다음 해인 2000년 또 다시 시샤팡마에 도전해 기어코 주봉 정상에 서고 만다. 이는 새끼손톱만큼 이라도 사욕이 있는 사람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후에 박 영석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내가 주봉 정상을 밟고 왔다고 무조건 주장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위해 이렇게 해왔는데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사람이 박 영석이다. 그 후로 나는 박 영석의 노예임을 자청했다. 나뿐만 아니라 박 영석에게는 그를 따르는 노예가 많았다. 그 까닭은 한 마디로 그의 카리스마 때문이다.

2001년 7월22일 박 영석이 K2(8611m)에 오르면서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 8천 미터급 14좌 완등에 성공하는 날, 나는 일생일대의 오보를 냈다. 위성전화로 들려온 베이스 캠프의 함성으로 '해냈구나'라는 감을 잡은 순간, 박대장이 정상에서 첫마디로 워라고 했는지를 물어봤다. 전해진 것은 "성우야 해냈다"였다. 성우는 박 영석의 큰 아들, 당시 초등학생이지만 아빠를 따라 큰 산 다니기를 좋아하고 아빠처럼 산악인이 되겠다는 그 녀석이다. "아, 역시 핏줄이 강하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박 영석이 정상에서 '성우야 아빠가 해냈다'라고 말한뒤 눈물을 흘렸다"고 기사를 썼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워낙 추워서 발음이 제대로 안된 탓인지 당시 박 영석이 한 말은 "형우야, 해냈다"였다.

형우는 고산증이 심한데도 14좌를 오르는 동안 꼬박꼬박 박 영석을 따라 원정을 다니며 베이스 캠프에서 매니저 역할을 군말 없이 해낸 김 형우 대원이었다. 대업을 이루는 순간, 감격에 겨워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박 영석은 그를 믿어준 후배를 제일 먼저 떠올렸던 것이다.

결국 후배들이 그를 따르는 이유는 아낌없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원정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몇 차례 집을 팔아먹은 끝에 지난해 마련한 서울 성북구 월곡동 아파트는 한때 이웃들에게 조폭 은신처로 알려지기도 했다. 후배들이 원정이 끝나도 집에 갈 생각을 않고 그의 집에 마치 베이스 캠프인양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지방 산악 대원들이 머물 곳도 역시 박 영석의 집이었다. 비록 깔끔한 편은 아니지만 박 영석은 후배들이 어질러 놓은 라면 그릇 등을 군말 없이 치우곤 했다. 그가 이토록 한없이 너그럽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애들은 나와 함께 꿈과 희망을 키우는 거야."

남극과 북극점 도전으로 세계 탐험사에 유례가 없는 산악 그랜드 슬램을 꿈꾸고 있는 박 영석. 그의 앞으로의 목표는 청소년들을 위한 탐험학교를 여는 것이다. 내년에는 소년소녀 가장들과 함께 아프리카를 종단할 계획을 세워놓고 마냥 즐거워하고 있다.

박 영석은 이따금 만취해서 말한다. "내가 산에 오르면서 보낸 아까운 목숨이 일곱이야. 내가 산에 오를 때면 애들이 사각사각 발자국 소리를 내며 함께 걷는 것 같아. 나는 이들을 위해서도 더 할 일이 많아. 남아 있는 자들, 후세들을 위해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을 해야돼." 이게 그의 진실이다. 꿈과 희망을 위하여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그의 사명인 것이다.

전창기자 je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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