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걱정 직장인 필독 레시피] 은퇴 후 견과류 농사꾼 된 화장품전문가
농사 잘 짓기 위해 포크레인 등 필요… 국민내일배움카드 통해 교육비 신청
인건비-시간 줄이며 생산 효율 높여…직접 기른 농산물 유통 법인도 설립
호두 소비량 증가하며 농사도 성공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에 있는 농장에서 기은서 씨가 중장비를 활용해 밭에 대추나무를 옮겨심는 작업을 하고 있다.
“자격증은 그냥 종이가 아닙니다. 자격증이 있으면 새로운 기회가 생겨요. 우연한 기회에 배워둔 것들이 삶에 도움이 될 때 큰 기쁨이 되지요.”
10일 오후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60대 여성이 굴삭기 운전석에 앉아 밭의 흙을 뒤집어 대추나무 옮겨 심을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 야산에 있는 밭은 굴착기가 몇 번 지나가자 고랑이 파이고 컨테이너 놓을 땅도 평평하게 다져졌다.
기은서 씨(63·본명 기창란). 농업회사법인 팜텍 대표다. 과거 아모레퍼시픽(구 태평양화학)에서 10년 가까이 일한 기 씨는 퇴직 후 남양주에 정착해 농사를 짓고 있다.
“농업기술센터 농기계은행에서 농기계를 빌리려면 자격증이 필요했어요. 마침 여성 경제인 모임에서 만난 경기 의정부의 한 중장비기술학원 원장님께서 ‘무료로 가르쳐 주는 정부 프로그램이 있으니 이 기회에 자격증을 따 보라’고 해서 도전했습니다.”
기 씨는 국비로 지원하는 내일배움카드 과정을 신청해 양주시 쌍둥중장비학원에서 1주일간 매일 10시간씩 굴착기와 지게차 운전 교육을 받은 끝에 건설기계조종사 1급 면허를 따냈다.
“농사 짓기 위해 포크레인 한 번 빌리는 데 하루 100만 원 가까이 듭니다. 중장비운전면허를 딴 뒤엔 농업기술센터에서 하루 11만 원에 장비를 빌릴 수 있었어요. 시간과 비용은 줄이면서 생산 효율성은 높아지더군요.”
굴삭기뿐 아니다. 땅콩과 호두 같은 견과류(너트) 가공제품이나 공장에서 생산한 화장품을 번쩍 들어 운반하는 지게차도 몰고 있다. 공장이나 창고의 필수 중장비다.
“여자라서 포크레인이나 지게차를 못 다룰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나이나 성별을 핑계로 못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고요. 나 스스로 필요한 것들을 정리할 수 있고 인건비도 줄일 수 있어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으니까 누구나 할 수 있지 않겠어요? 여성도 물론 할 수 있어요.”
● 화장품 전문가에서 농업인으로
기 씨는 1986년 아모레퍼시픽이 수출을 시작했을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제1호 주재원으로 근무했다. 약 2년간 미국 20여 개 주로 출장을 다니면서 화장품 마케팅과 홍보, 영업에 백화점 입점 업무까지 담당했다.
“아모레퍼시픽은 대학을 한 번 더 다닌다고 할 정도로 공부를 많이 시켰어요. 덕분에 크림 상태만 봐도 어느 회사 제품인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전문가가 됐지요.”
10년간 근무한 아모레퍼시픽을 퇴사한 후에도 화장품과의 인연을 이어 나갔다. 결혼 후에는 소매점을 열고 본격적으로 화장품을 판매했다. 요즘엔 올리브영 같은 종합 화장품 매장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다양한 중소 화장품 브랜드 매장들이 거리에서 각축전을 벌였다.
그는 2012년 화장품 수출업체 아이앤알을 설립했다. 당시 코리아나 화장품 ‘오르시아’ 브랜드 총괄 책임자를 맡았다. 중국 시장에서 ‘오르시아 28데이 앰플’이 빅히트를 치면서 총판 계약을 맺게 됐다.
“중국 파트너가 중국 전역 보세 무역관 허가권자였어요.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매장 2000개를 목표로 광저우, 심천, 심양 무역관 등에 입점했습니다. 한류 바람을 타고 매출이 수직 상승했지요.”
하지만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반발한 중국 정부의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 조치) 탓에 5개 매장을 만든 데 만족하고 철수해야 했다.
기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베트남으로 시선을 돌렸다. 베트남 박람회에서 만난 파트너와 함께 화장품 현지 제조를 타진했지만, 이번에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이 터지며 중단해야 했다.
그때 농업으로 눈을 돌렸다. 남양주에 2014년 화장품 공장 부지로 사 놓은 약 8000㎡(2500여 평) 땅이 있었다. 화장품보다 식품이 더 유망하다고 판단했다. 매실과 대추, 서리태, 자두, 감자, 고구마, 고추, 토마토, 참외 등을 심었다. 동네 주민들과 협동조합도 만들어 농산물 유통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정말 많은 작물을 심고 거두며 팜텍도 설립했다. 페이스북에 쓰는 농사일기에는 고된 작업 속에서도 희망을 찾는 그만의 고민이 담겨 있다.
“하늘이 도왔을까. 배추, 무우 심는 날. 비닐 덮기 전 때마침 비를 내려 주고, 심고 나니 또 비를 내려 일손을 거든다. 허리 한 번 펴고 알타리무우 심고 쪽파, 돌산갓, 상추까지 씨를 뿌리고 나니 다시 비가 내린다. 팔 다리는 후덜덜, 몸은 천근만근, 속옷까지 흙물 빛. 나눠 먹을 흐뭇한 생각에 빗소리 음악 삼아 차 한잔에 피로를 내려 본다.”(2023년 9월 16일 농사일기)
이후 그는 콩, 호두 같은 견과류(너트)에 집중했다. 하루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최고의 비상식량이라 생각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비상식량에 관심을 두던 그는 2021년 너트를 제품화해 ‘다산해 쇼핑몰’에서 판매했다. ‘다산해’는 다산(茶山) 정약용 생가가 있는 남양주 지역색을 살린 브랜드다. 직접 생산한 너트를 가공해 바로 유통한다. 블루베리를 넣은 요거트 너트는 소화력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고, 혈액 순환을 돕는 호두는 메이플시럽을 넣어 바삭하게 한 번 더 가공해 프리미엄 제품으로 만들어 냈다.
기 씨는 화장품 제조업도 최근 다시 시작했다. 중저가 브랜드 방문판매용 화장품 업체 D사와 주문자상표생산방식(OEM) 계약을 맺고 직접 생산해서 납품하는 1차 벤더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 오랜 화장품 전문가로서의 경력을 활용한 사업인 셈이다.
● 음악이 있는 농장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정년을 맞아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아깝다고 생각해요. 이제 시작인데요. 나이가 들어도 새로운 걸 배우고 도전해야 가슴이 두근거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베트남에서 진행하던 화장품 사업이 큰 위기를 겪을 때 농사를 지으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면서 다음을 준비한 것처럼 말이다. 기 씨는 그동안 바빠서 하지 못하던 일들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해 여러 가지 취미활동 등을 하고, 많이 함께하지 못하던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자신을 위한 투자에 열중하면서 변화를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자격증도 많이 취득했다. 굴삭기, 지게차 운전면허증만이 아니다. 무역관리사 자격증, 동력수상레저기구조종 1급 면허증, 윈드서핑 지도자 자격증도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무치료기술자 자격증도 따낸 것.
“작년부터 법이 바뀌어서 나뭇가지 하나 자르는 데에도 자격증이 필요하게 됐어요. 예전엔 아무나 할 수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래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지난해 3개월간 서울대 식물병원에서 매주 토요일, 하루 8시간 동안 나무치료기술자 교육을 받았다. 나무 옮겨 심기, 전정 작업, 농업용 드론 날리기, 나무 생리학, 질병학 등 식물 치료에 대한 이론과 현장 실습을 병행했다.
“나무치료기술자 자격증을 취득하는 과정은 정말 힘들었어요. 하지만 그 자격증 하나가 얼마나 큰 기회가 되는지 아시나요? 관급공사를 할 때 나무치료기술자가 있고 없고의 점수 차이가 정말 크거든요. 거기에 중장비 운전면허까지 있으니까 정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어요. 농사를 짓든 사업을 하든 다양한 자격증은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다고 생각해요.”
기 씨는 10년 전부터 한국여성경제인협회에서 활동 중이다. 이 네트워크는 그의 비즈니스 확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화장품 제조를 계획했을 때 남대문, 동대문, 화곡동에서 시장조사를 했고 박람회나 수출 관련 세미나에도 수없이 참석해 정보를 얻었다. 베트남 진출도 남양주시 상공회의소를 통해 제안을 받고 결정하게 됐다. 그는 “해외시장에 진출하려고 할 때는 지방자치단체가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농사 후 피로를 노래로 푼다. 그의 남양주 농장 한켠에는 음악연습실도 만들어져 있다. 여성경제인협회 회원들과 8년간 매주 토요일에 모여 기타치며 합창하는 모임을 해왔다. 회원들끼리 결성한 밴드에서 보컬로 활동하다가 음반까지 내게 됐다. ‘그대를 만날줄은’ ‘내 마음이 흔들려’(설운도 작사, 작곡)이란 앨범이다. 매주 2회 씩 유튜브에 노래일기를 기록하고 있고, 본격적으로 음악을 공부하고 싶어 한양대 MIDI 작곡과에 편입해 4학년에 재학 중이기도 하다.
“전 가만히 앉아 있으면 그 시간이 너무 아까워요. 뭐든 배워야 하고 뭐든 해야 하죠. 이런 성격이 쉬지 않고 사업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젊었을 때는 대학가요제에 나가 가수를 해 볼까도 생각했고, 예식장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도 했지요. 남양주 농장에서 일도 하고, 농사도 짓고, 공부도 하고, 노래도 하고, 연주도 하면서 지냅니다. 혼자 노는 법을 배워야 은퇴 후 삶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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