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세에 ‘임피’ 대신 ‘명퇴’… 센터 도움받아 ‘재재취업’[은퇴 레시피]

  • 동아일보

[은퇴 걱정 직장인 필독 레시피] 25년 은행원에서 전기차충전기관리사로
퇴직 선배 조언에 전기기능사 도전… 기숙사서 고3처럼 주경야독 끝 합격
자격증 땄지만 실무 경험 없어 장벽… 45개 기업 지원했지만 모두 떨어져
‘내일센터’ 도움으로 재취업 성공… “은퇴자 돕는 기관 적극 활용해야”

우리은행에서 25년간 일했다. 55세에 명예퇴직 후 6년간 두 차례 재취업했다. 몸담았던 금융권도 아니다. 개발자들을 관리하는 프로젝트 매니저(PM)를 거쳐 전기차충전기관리사로 일하고 있다. 전기차 충전기 운영 및 유지 보수 기업 ㈜이지차저에서 근무하는 정혁진 씨(59)를 지난달 18일 서울 종로구 동아미디어센터에서 만났다.

한 번도 어렵다는 재취업에 거듭 성공한 비결로 정 씨는 ‘운(運)’을 꼽았다. 하지만 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남다른 점이 보였다. 귀담아듣기와 적극성이다. 그는 재취업을 준비하는 동안 먼저 퇴사한 선배들의 조언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기고 매일같이 재취업 지원 센터 문을 두드렸다. 고3처럼 주경야독하며 자격증 시험을 준비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예고 없이 찾아온 행운을 움켜쥘 수 있었다.

● ‘25년 금융맨’의 퇴사

전기차 충전기 운영 및 유지 보수 기업 ㈜이지차저에서 전기차충전기관리사로 일하는 정혁진 씨(59)가 서울 종로구의 한 주차장 충전기를 점검하고 있다. 은행에서 2022년 명예퇴직한 정 씨는 IT 업체 프로젝트 매니저를 거쳐 지난해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인생 세 번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전기차 충전기 운영 및 유지 보수 기업 ㈜이지차저에서 전기차충전기관리사로 일하는 정혁진 씨(59)가 서울 종로구의 한 주차장 충전기를 점검하고 있다. 은행에서 2022년 명예퇴직한 정 씨는 IT 업체 프로젝트 매니저를 거쳐 지난해 전기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인생 세 번째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은행 입사 후 국제, 투자, 여신 같은 다양한 업무를 담당했다. ‘월화수목금금금’ 하던 시절, 밤낮없이 일하다 보니 어느덧 50대 중반이었다. 2022년 초 명예퇴직을 했다. 임금피크제와 퇴사를 놓고 고민한 결과, 퇴사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조금이라도 일찍 인생 2라운드를 준비하는 게 낫겠다 싶었다.

퇴사 이후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두 자녀는 다 컸고, 최소 생활이 가능한 정도의 현금 흐름은 마련해 둔 상황. 조급한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멍하니 시간을 보냈다.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낮잠을 자다가 산책을 했다. 그는 “은퇴 이후 생활에 대한 방향은 미리 정해 두지 않았다. 막상 퇴사를 하게 되면 상황에 따라 선택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유를 즐기는 틈틈이 은퇴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겼다.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 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 자신의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력과 정신력이 단단하고 일을 대하는 마음도 펄펄 끓고 있었다. 제2의 직업에 대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퇴직 전 관심이 생겨 조경기능사 자격증을 따 뒀지만 직업으로 연결하긴 쉽지 않았다. 은행 동료들의 퇴직 후 행보를 톺아보니 세 가지 길이 보였다. 첫째, 금융권 다른 직종으로의 전직이다. 여신 관리, 신용보증 관리, 재무 설계 등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경우다. 둘째, 공인중개사나 주택관리사가 돼서 재취업한다. 아파트 관리소장 등으로 일하는 경우도 많다. 셋째, 제3의 길이다. 귀농, 자영업 같은 개인 관심사에 따라 진로를 정한다.

● IT 기업 PM으로 전직

첫 번째와 두 번째 길은 마음이 당기지 않았다. 제3의 길을 염두에 두고 취업 설명회에 참석했다.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은퇴한 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마련돼 있었다. 서울서부중장년내일센터에서 강의를 듣고 취업 관련 상담을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내일센터에서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동양시스템즈 채용 공고가 떴다고 알려 왔다. ‘개발 직무인데 경력 무관이고 코딩을 몰라도 된다. 중장년층 타깃 채용이라 도전해 볼 만하다’고 했다. 2022년 하반기 서류 전형과 직무 교육, 심층 면접을 거쳐 연말에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퇴직한 지 딱 1년 만이었다.

“당시 IT 업계는 개발자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던 때였습니다. 해당 기업은 당시 CEO(최고경영자)가 5060세대도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실리콘밸리를 롤모델 삼아 시니어 채용을 전격 추진했죠. 두 달 넘게 강도 높은 실무 교육을 받은 뒤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영어에 능통하다는 강점 덕분에 해운사업부로 배치됐다. 필요한 기능을 개발자에게 전달하고 프로그램을 기획, 관리하는 PM 역할이었다. 고객사와의 소통부터 개발 일정 조율까지 프로젝트 전반을 총괄했다. 그는 “은행 재직 시절 새로운 업무가 도입될 때마다 전산부와 협의해 시스템으로 구현하던 일과 비슷했다. 당시 쌓아둔 개발 기초 지식과 부서 간 소통 능력이 큰 무기가 됐다”고 했다.

하지만 두 번째 직장은 오래가지 못했다. 2024년 7월 회사가 경영난으로 도산한 것. 관련 경력을 살려 다시 구직에 나섰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개발자 채용 붐이 한풀 꺾인 데다 챗GPT 같은 인공지능(AI)이 보편화되면서 업계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나이와 이력서에 내세우기엔 애매한 재직 기간도 발목을 잡았다.

● 주경야독 끝 전기기능사 취득

다시 원점에 선 그는 다양한 구직 매체를 참고하며 진로를 탐색했다. 사람도 만나고 유튜브나공공기관 구직 사이트도 수시로 확인했다. 고민 끝에 지난해 7월 전기기능사 자격증에 도전하기로 결심했다. 이 자격증을 취득해 시설 관리직에 재취업했다는 직장 1년 선배의 경험담이 계기가 됐다.

“중장년층이 전기기능사를 따면 취업률이 꽤 높습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나 빌딩 관리, 전기공사 업체 등 갈 수 있는 곳이 많거든요. 나이 제한 없이 취업이 가능하고 원할 때까지 일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평생 해온 은행 업무와 무관하지만, 흥미와 의지가 있으니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준비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필기시험 세 과목에 합격해야 실기시험을 볼 수 있는데, 필기 합격률은 30%, 실기 합격률은 70% 선이다. 특히 실기는 4시간 동안 직접 회로를 배선하는 방식이어서 독학으론 준비하기 어렵다. 정 씨 역시 실기 준비를 위해 경기 화성시에 있는 한국폴리텍대학 화성캠퍼스에 입학했다.

통학 시간을 아끼기 위해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수업을 듣고 밤 12시까지 공부하는 일과를 반복했다. 주말 하루만 서울 집에 다녀오는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동년배 동기들과 정보를 나누고 서로 의지하니 능률은 올랐다. 그는 “고3 이후로 늦은 시간까지 책상에 앉아 본 건 처음”이라며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덕분에 단기간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 전기차충전관리사 도전

자격증은 땄지만 취업 문은 높았다. 올해 초 서류를 넣은 45곳에서 모두 고배를 마셨다. 중장년층은 자격증이 있어도 실무 경력이 없으면 취업 문을 뚫기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러다 우연히 돌파구를 찾았다. 자격증을 취득했거나 직업 훈련을 이수한 중장년에게 실무 경험(인턴)을 제공하는 중장년내일센터의 ‘중장년 경력지원제’였다.

그는 이 제도를 통해 올해 4월 이지차저에 정식 입사해 전기차충전기관리사로 일하고 있다. 충전기를 정기 점검하고 접수된 장애 신고를 처리하는 것이 주 업무다. 그가 담당하는 곳은 서울 강북 지역 80여 곳으로, 하루 평균 6∼10곳을 방문한다. 회의가 있는 월요일을 제외하곤 온종일 외근이다. 그러다 보니 날씨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효율적 이동을 위해 전날 미리 동선을 짜두는데, 비가 올 때는 안전사고에 대비해 지하 주차장 충전소를 방문한다.

전기차충전기관리사가 되려면 어떤 자격이 필요할까. 정 씨는 “필수 자격 요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기기능사나 전기산업기사, 전기기사 자격증을 가진 이가 많다. 최근에는 관련 민간 자격증도 주목받는 추세”라며 “온종일 이동해야 하는 업무 특성상 운전을 즐기고 계획적인 성격이라면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최근 기후에너지환경부에 따르면 전국 전기차 누적 등록 대수는 100만 대, 충전기는 47만 기를 돌파했다. 크고 작은 충전기 관련 업체 20여 곳이 충전기 제작과 관리 사업에 뛰어든 상태다.

● 고마운 n번째 무대

사무직으로 일해 온 그에게 기계와 설비를 다루는 일은 완전히 새로운 도전이었다. 처음에는 시행착오도 겪었다. 도통 해결되지 않던 문제의 원인이 알고 보니 건전지 탓으로 밝혀진 일도 있었다. 그는 “기계를 다루는 것에 대한 막막함은 매뉴얼 숙지와 소통으로 극복했다. 원리를 이해하고, 매뉴얼을 지키며, 사수와 적극 소통하면 웬만한 문제는 해결된다”고 했다.

입사한 지 두 달 반. 지금은 충전기 점검과 애프터서비스(AS)를 담당하고 있지만, 경력을 쌓아 업무 영역을 넓히겠다는 꿈도 생겼다. 새로운 기술을 몸으로 익히며 성장하는 감각을 오랜만에 느낄 수 있어 즐겁다고. 무경력 입사이기에 연봉은 3000만 원대로 예전 급여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는 이를 ‘메이저리그에서 마이너리그로의 이동’에 비유했다.

“돈을 얼마나 받느냐보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인생을 농사에 비유하자면, 지금은 밭에 새로운 품종을 심어 보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뛸 수 있는 n번째 무대가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합니다.”

QR코드를 스캔하면 채널A 유튜브 ‘건강IN으로’에 업로드된 인터뷰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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