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수의료 중과실 기준 놓고 환자-의사 갈등… 정부 “기준 구체화”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5월 14일 04시 30분


내년 개정 의료분쟁조정법 시행앞
업무상 과실치사상 유죄 10건 분석… 기소대상 중과실 여부 모호해 혼선
의료계 “경과 안좋다고 처벌 안돼”… 환자단체는 “중과실 범위 좁다” 반발

최근 술에 취해 응급실로 이송된 환자의 뇌경색을 진단하지 못한 응급의학과 레지던트가 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응급실 지침상 신경학적 검사를 했어야 하는데, 이를 어기고 퇴원시켰다는 게 유죄 판단의 주된 이유다. 의료계는 “현장에서 지키기 어려운 사문화된 지침일 뿐 아니라 환자 경과가 좋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형사처벌을 받아선 안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년 4월부터 의료사고를 낸 의료진의 면책 범위를 넓힌 이른바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이 시행되지만 형사 기소 대상인 ‘중대 과실’의 기준이 여전히 모호해 현장의 혼선이 계속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본보가 전문가 자문을 통해 최근 5년간 필수의료 의료진이 1심에서 업무상 과실치사상으로 유죄를 선고받은 판결 10건을 분석한 결과, 상당수는 개정안을 적용했을 때 중과실 여부가 모호해 형사 기소를 두고 병원과 환자 측의 갈등이 이어질 것으로 평가됐다.

● 의료계 “중과실 모호, 형사 기소 계속될 것”

13일 의료계에 따르면 대전지방법원 천안지원은 지난달 30일 음주 상태의 환자에게 신경학적 검사를 하지 않고 퇴원시킨 응급의학과 레지던트 2명에게 각각 금고 10개월과 금고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이들이 업무상 주의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점을 양형 사유로 들었다.

의료계는 내년 4월 필수의료 분야의 형사 처벌 특례를 도입한 의료분쟁조정법 개정안이 시행돼도 이 같은 법적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개정안은 중증·소아·응급·분만 등 필수의료 분야에서 의료 사고가 발생했을 때 ‘12대 중과실’에 해당되지 않고, 손해배상 등의 조건을 충족한 경우 업무상 과실치사상죄로 기소를 하지 않는 게 핵심이다.

의료계는 12대 중과실 중에서도 △사망이나 신체 손상 발생이 예측 가능했는데도 필요한 진단이나 처치 등을 하지 않은 경우 △의학적 진료 지침이나 통상적으로 수용되는 진료에서 벗어난 의료 행위 등 두 조항이 문제가 많다고 지적한다.

2021년 식은땀, 구토 등의 증상으로 내원한 환자에게 흉부 컴퓨터단층촬영(CT)을 시행하지 않아 대동맥박리를 진단하지 못한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집행유예를 받은 사건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이형민 응급의학의사회장은 “질환을 진단하지 못했다고 처벌을 받는 사례도 있다”며 “어느 정도로 검사를 해야 면책이 되는지 법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복지부 “중과실 기준 구체화하겠다”

반면 환자단체는 12개 중과실의 범위가 오히려 좁아 의료진에게 과도한 특혜를 주는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일례로 생후 6개월 영아에게 골수 채취를 위한 바늘을 깊게 찔러 사망하게 한 소아청소년과 레지던트는 올 3월 2심에서 벌금 2000만 원형을 선고받았다. 박호균 변호사는 “개정안이 시행될 경우 경력이 부족한 의사가 무모하게 진료를 하다가 사고가 나면 중과실로 볼 수 없어 처벌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환자단체 등은 중과실 유형을 법률에 열거하지 말고 의료사고 심의위원회를 통해 개별 사건마다 중과실 여부를 따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안기종 환자단체연합회장은 “개별 사건의 구체적 사정과 의료 행위의 특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중과실 여부를 넓게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내년 4월 개정안 시행에 앞서 중과실 기준을 더 구체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어은경 순천향대 부천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개정안에는 고위험 필수의료 행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료적 실수가 포괄적으로 나열돼 있다”며 “개정안의 취지가 과도한 사법 리스크로 인한 필수의료 인력의 이탈을 막는 것인데, 이를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복지부는 이달 중 10명 안팎의 협의체를 구성해 중과실 기준을 구체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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