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구룡중의 점심시간이 1시간인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6월 10일 16시 38분


사교육 1번지에서 공교육 1번지로 변신 위한 첫걸음
체덕지 활성화만이 공교육 정상화의 토대라는 인식
점심시간 활용한 버스킹, 스포츠 리그 등 다양한 활동
학생과 학부모 호응이 지속 가능성의 관건이 될 듯

서울 강남구 선릉로에 위치한 구룡중은 경쟁교육에 지친 학생들에게 ‘숨 쉴 틈’을 제공하기 위해 점심시간을 1시간으로 늘렸다. 5일 점심시간에 학생들이 1학년 학생들로 구성된 미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감상하고 있다. 구룡중 제공
5일 서울 강남구 선릉로 구룡중의 점심시간. 학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 ‘미르’의 버스킹 곡, ‘인생의 회전목마’가 울려퍼지자 학생들의 환호성으로 교내가 들썩였다. 이들이 버스킹을 시작한 지는 불과 3일. 하지만 즉시 큰 화제를 불러왔다. 공부에만 매달려온 강남 아이들에게 ‘학교도 즐거운 곳’이라는 인식을 심어준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이어졌다.

미르 단원으로 활동하는 장유진 학생(1학년)은 “코로나19 때문에 초등학교 때는 오케스트라 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라며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어 즐겁고, 박수를 쳐주는 친구들을 볼 때 뿌듯한 마음도 든다”라고 말했다.

구룡중은 이처럼 점심시간을 활용해 학생들이 취미활동을 할 수 있도록 적극 장려한다. 활동내용은 버스킹부터 스포츠 런치리그, 영화 보기, 독서, 작품 전시, 학생동아리 홍보, 양재천 생태 체험 등 다양하다. 이를 위해 점심시간을 60분으로 다른 학교보다 5분 정도 늘렸다.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공부에 지친 일상에서 ‘숨을 쉴 수 있는’ 틈을 준다는 것이다.

○ 교장이 등교하는 학생에게 목례하는 학교

이뿐만이 아니다. 구룡중이 4월부터 실시 중인 0교시 건강 걷기와 수업 시간 사이를 이용한 틈새 운동시간도 학생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또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교장선생님은 아침마다 등굣길 학생들에게 깍듯하게 목례하고, 일부 학생들과는 하이파이브도 한다.

강남구는 한국에서 가장 사교육이 발달한 지역으로 손꼽힌다. 그 한복판에 위치한 구룡중에서의 최근 진행되는 일들이 예사롭지 않은 시도로 평가받는 이유다.

이러한 변화는 모두 ‘즐겨야 성장한다’는 오정훈 교장의 교육철학에서 비롯됐다. 올해 초 구룡중에 부임한 그는 서울대 체육교육과 출신으로, 체덕지(體德智) 교육의 신봉자이다. 점수 따기 경쟁을 불러온 ‘지덕체’를 ‘체덕지’로 바꿔야 한국교육이 산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는 관악동작교육지원청 교육장을 마치고 중학교로 왔다. 수능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고등학교보다 중학교에서 기본교육이 가능할 것이고 판단한 것이다. 여기에서 기본이란 체력, 학력, 인성 등을 포함한다. 오 교장은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방법이 어려우면 교육은 길을 잃고 다시 경쟁교육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 “강남을 사교육 1번지에서 공교육 1번지”로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그는 경쟁 대신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학교”를 강조한다. 학교가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스토리를 갖게 해주면 “강남이 사교육 1번지에서 공교육 1번지로 변할 수 있다”고도 믿는다.

최근 국내에서 분야를 막론하고 많이 거론되는 용어인 스토리는 ‘개인적인 서사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특히 기업체 등에서 마케팅이나 홍보에서 필요충분조건처럼 여겨지고 있다. 기술의 발달로 기능적인 차이가 없어진 상황에서 독자적인 스토리로 소비자를 감동시켜야만 눈길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스토리가 그만큼 중요해졌는데도 국내 어디에서도 이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주는 곳이 없다는 점이다. 경쟁 위주 중심으로 교육시스템이 운영되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오 교장은 이에 대해 해법으로 ‘3S(Sports-Study-Saving)’를 제시했다. 스포츠는 스포츠 가치의 생활 속 실천과 신체 활동의 습관화를 뜻한다. 스터디는 창의성 등 미래 핵심역량의 강화와 독서의 습관화다. 절약은 절약의 실천과 인류와 지구를 구하기 위한 생태전환교육을 가리킨다.

구룡중 학생들이 5일 점심시간에 열린 ‘스포츠 런치리그’에서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구룡중 제공
○ ‘건강한 위험’ ‘건강한 경계’ ‘건강한 열등감’

오 교장의 시도에는 코로나19나 챗 GPT 등 인공지능(AI)의 급속한 확산 등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요즘 같은 시대에 “기본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판단도 깔려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기본은 교육 공동체가 함께 성장하는 바탕이기도 하다.

그는 교육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교사는 학생에게 ‘건강한 위험’을 제공하고, 학생은 ‘건강한 열등감’이 필요하며, 학부모에게는 ‘건강한 경계’가 요구된다”고 강조한다. ‘건강한 위험’은 학생의 흥미와 발전단계에 따라 적절한 도전과제를 제시함으로써 학생이 자신감과 배우는 기쁨을 느끼게 해주는 일을 의미한다.

‘건강한 열등감’은 현재의 나를 과거의 나와 비교해 뒤처졌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경쟁 상대가 타인이 아닌 나라는 사실이다. ‘건강한 경계’는 학교 교육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와 비판은 하되, 참견과 비난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같은 오 교장의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실천이 중요하다. 여기에 학생과 학부모의 호응도 핵심 변수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이 학교가 가고 싶은 곳, 즐기는 곳, 우정을 다지는 곳이란 인식을 갖게 되면 학교는 변할 수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기대하고 있다.

한국 학생들에게 초중고 12년은 ‘세상에서 가장 길고 위험한 지뢰밭’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를 바꾸기 위한 시도가 사교육의 중심지로 여겨지는 강남의 한복판에 위치한 중학교에서 펼쳐지고 있다. ‘잘하면 사교육 1번지에서 공교육 모델이 나오는 건 아닐까’라는 기대감마저 든다. 공교육의 회복이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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