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요강꽃 본 적 있나요…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미래[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4년 5월 3일 08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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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포천 국립수목원으로 떠나는 여행

국립수목원이 개체 수를 매년 확인하며 보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희귀식물 ‘광릉요강꽃’. 국립수목원 제공


햇빛에 반짝이는 나무 잎사귀들이 초록의 다양한 변주를 만들어낸다. 눈이 시원해지니 허파까지 상쾌해진다. 얼마 전까지 노란색 황매화와 분홍색 진달래가 기세를 뽐냈다면 오월의 꽃은 흰색이 대세다. 은근한 자태가 보고 있어도 그리운 가침박달, 청순한 병아리꽃나무, 흰양귀비…. 큰줄흰나비는 순백의 민백미꽃이나 미나리냉이 위에 내려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

국립수목원 희귀특산식물보존원의 가침박달. 포천=김선미 기자

국립수목원에 핀 흰양귀비. 포천=김선미 기자


이번 주말 가족 나들이를 계획한다면 경기 포천의 국립수목원을 추천하고 싶다. 오월의 신록이 아름다운 곳, 우리나라의 대표적 희귀 야생난초인 광릉요강꽃이 지금 만개한 곳, 지나온 날들을 나무들이 말해주는 곳, 그래서 지속 가능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 바로 국립수목원이다.

미나리냉이 위에 내려앉은 큰줄흰나비. 포천=김선미 기자


●희귀한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 봉선사천(川)을 가로지르는 수목원교(橋)를 건넌다. 초록색 하트 잎을 품은 계수나무가 반긴다. 수목원 여행의 시작이다. 가만 보니 대형 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든 관람객들이 한 방향으로 움직인다.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이 꽃을 피운 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을 보기 위해 몰려든 관람객들. 국립수목원 제공


1990년대 박신양·최진실 주연의 영화 ‘편지’를 봤던 독자들이라면 기억할 것이다. 수목원 연구사인 남자 주인공이 여자친구를 새벽에 전화로 깨워 수목원으로 데려간 장면을. 남자는 상기된 표정이었다. 오늘 아침 귀한 꽃이 피어났다고, 그 꽃을 자신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가장 좋은 것을 어서 보여주고 싶은 게 사랑일 것이다. 여자가 꽃 이름을 묻자 남자는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개불알꽃이요.” 당시 영화의 주요 촬영지가 국립수목원이었다. 세월이 흐른 지금도 관람객들은 이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찾아온다.

영화 ‘편지’에서 수목원 연구사인 남자 주인공이 여자친구에게 기뻐하며 개화 소식을 알렸던 복주머니란(개불알꽃). 포천=김선미 기자

국립수목원 복주머니란속전시원에서 촬영하고 있는 관람객들. 포천=김선미 기자


개불알꽃은 가운데가 길게 늘어지는 꽃잎 모양을 보고 민간에서 익살스럽게 불렀던 이름이다. 하지만 국가수목유전자원목록위원회는 입에 올리기 민망했던 이 꽃의 이름 대신 ‘복주머니란’을 선택해 2007년 펴낸 국가표준식물목록에 그 이름을 올렸다. 고로 개불알꽃은 이제 복주머니란으로 불러야 한다.

2일 광릉수목원에 피어있는 복주머니란. 포천=김선미 기자


복주머니란 속(屬) 식물은 전 세계적으로 멸종 위험에 처해 있다. 한국에는 복주머니란, 털복주머니란, 광릉요강꽃 이렇게 세 종류의 종(種)이 자생한다. 특히 광릉요강꽃은 동아시아에만 분포하는 희귀식물로, 국내에서도 경기, 강원, 전북 등에 매우 제한적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1931년 광릉숲 죽엽산 자락에서 처음 발견되고 입술 모양 꽃잎이 요강처럼 생겼다고 해서 광릉요강꽃으로 불린다. 서양 이름은 ‘Korean lady’s slipper’(한국 숙녀의 슬리퍼). 무분별하게 채취돼 자생지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이 희귀식물을 국립수목원이 2021년 세계 최초로 기내 종자 발아에 성공했다. 대량 증식의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자생지인 광릉숲 죽엽산에 핀 광릉요강꽃. 아름다운 자태의 군무를 보는 것 같다. 국립수목원 제공


많은 이들이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개불알꽃)이 같은 꽃인 줄로 잘못 알고 있다. 하지만 둘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다. 복주머니란은 분홍빛을 띠고 통통한 형태인데 비해 광릉요강꽃은 중앙의 붉은 부분을 미색의 꽃잎이 갸름하게 감싼다. 특히 광릉요강꽃은 잎이 360도 퍼지는 여성의 풀(full) 스커트 형태라 ‘치마난초’로도 불린다. 치마를 확 펼쳐 춤 추는 무용수 같은데,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 느낌이 물씬 난다.

광릉요강꽃(왼쪽)과 복주머니란(오른쪽)은 꽃과 잎의 형태가 확연히 다르다. 포천=김선미 기자

360도 퍼지는 치마를 입은 무용수 느낌의 광릉요강꽃. 국립수목원 제공


국립수목원 희귀특산식물보존원 부근 나무 펜스 구역에서는 광릉요강꽃과 복주머니란, 약용식물원 가는 방면의 복주머니란속 전시원에서는 교잡종인 ‘얼치기복주머니란’을 볼 수 있다. 빛이 들 때마다 카메라 셔터들이 ‘찰칵찰칵’. 이번 주말을 넘기지 않고 방문하면 좋겠다. 지금을 놓치면 다시 1년을 기다려야 한다.

백두산 인근에서 자생하는 노랑복주머니와 복주머니란의 교잡종인 ‘얼치기복주머니란’. 포천=김선미 기자


●수목원에서 생각하는 과거와 미래


국립수목원은 88서울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가가 운영하는 수목원이 필요하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1984년부터 조성공사를 시작해 1987년 문을 열었다. 조선 세조의 능(陵)인 광릉의 부속림으로 500년 넘게 훼손되지 않고 잘 관리된 천혜의 부지에 전국 임업시험장에서 가져온 나무들을 심었다. 수목원 명칭은 1999년 ‘국립수목원’으로 바뀌었고, 개원 당시 수목원 입구에 세웠던 ‘광릉수목원’ 표석은 수목원 내 산림박물관 앞으로 옮겨졌다. 전 세계적으로 온대북부지역에서 찾아보기 힘든 온대활엽수 성숙림에 서어나무와 졸참나무 등이 사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이다. 국립수목원로에 들어서면서부터 눈이 맑아지면서 온 몸이 연두빛으로 물드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인 국립수목원 전경. 국립수목원 제공
개원 당시 수목원 입구에 있던 ‘광릉수목원’ 표석은 지금 국립수목원 내 산림박물관 앞에 있다. 포천=김선미 기자


102ha 규모의 전시공간을 갖춘 국립수목원에는 7개 테마의 숲길이 약 20km에 걸쳐 조성돼 있다. 숲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숲생태관찰로(460m)를 걸은 후 커피 한 잔을 즐기며 육림호를 바라보는 코스가 가장 사랑받는다. 호숫가 벤치에 앉아 새 소리를 들으며 ‘물멍’(물을 보며 멍때리기)하면 감각은 열리고 마음은 내려놓게 된다. 어른 팔만한 물고기들도 보인다. 40여 년 전 경기 청평 내수면연구소에서 기르던 물고기 5000여 마리를 옮겨와 그중 잉어와 비단잉어가 살아남았다고 한다.

마음을 내려놓기에 좋은 국립수목원 육림호. 포천=김선미 기자


물, 나무, 산, 숲이 어우러지는 육림호는 국립수목원의 대표 명소다. 특히 봄에는 물가에 핀 연분홍 철쭉이 청순한 경관을 이룬다. 그런데 산철쭉과 철쭉도 사람들이 자주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예다. 흔히 철쭉으로 불리는 진분홍 꽃의 이름은 산철쭉, 물철쭉으로 잘못 불리는 연분홍 꽃의 이름은 철쭉(연달래)이다. 사랑은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 이젠 철쭉을 철쭉으로 불러야 한다.

연분홍빛 철쭉이 육림호 주변에 피어나는 국립수목원의 봄 풍경. 포천=김선미 기자


국립수목원은 역대 대통령의 기념 식수들이 자리 잡고 있어 ‘국가대표’ 수목원의 차별점을 보여준다. 소나무와 주목 등 상록 침엽수가 주를 이루지만 노각나무와 무궁화도 있다. 대대로 심은 전나무 숲길도 유명하다. 국토녹화와 임업 발전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헌정한 ‘숲의 명예전당’도 들러보면 좋겠다. 세계적 육종학자인 고 현신규 박사, 천리포수목원을 일군 고 민병갈 원장, 임업에 열정을 지녔던 고 최종현 SK 창업회장, ‘제1차 치산녹화 10개년 계획’을 조기에 달성한 고 손수익 전 산림청장 등 8명이 헌정돼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1970년 4월5일 식목일에 국립수목원(당시 광릉시험림)에 기념식재한 은행나무. 포천=김선미 기자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진행된 국립수목원. 국립수목원 제공
국토녹화와 임업 발전에 공을 세운 인물들을 헌정한 ‘숲의 명예전당’. 포천=김선미 기자

올해 25주년을 맞은 국립수목원은 이번 어린이날을 맞아 ‘알숲놀숲’이라는 산림 새싹 키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알파 친구들아, 숲에서 놀자, 놀면서 숲을 즐기자’라는 뜻으로 식물학자와 정원사 등 수목원을 둘러싼 다양한 직업군을 아이들이 체험하도록 준비했다. 미래세대가 디지털 기기를 잠시 내려놓고 숲과 친해지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한 어린이가 가족과 함께 국립수목원을 방문해 지도를 들고 나무들을 찾아보는 모습. 포천=김선미 기자

임영석 국립수목원장이 산림박물관 앞 벤치에 앉아 관상수원에 세워진 산림헌장을 보고 있다. 포천=김선미 기자

●국립수목원 속 ‘나만의 시크릿가든’


국립수목원은 25개 전문 전시원에 4854종(19만9212본)의 식물이 식재돼 있다. 광릉요강꽃 등 희귀식물 23종, 장수하늘소 등 천연기념물 20종이 산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의 시 ‘꽃’에서). 드넓은 국립수목원에서는 누구든 ‘나만의 식물’, ‘나만의 시크릿가든’을 삼을 수 있다. 누군가는 봄을 일찍 알리는 풍년화에, 누군가는 바람에 쓰러지고도 새잎을 돋아내는 휴게광장의 121살 오리나무에 마음이 끌릴 것이다. 누군가는 수목원 안의 키 작은 나무언덕에 올라 헝클어진 마음을 정돈할 것이다.

바람에 쓰러진 국립수목원 휴게광장의 121살 오리나무에서 새 잎들이 솟아나고 있다. 포천=김선미 기자

개인적으로는 우리 자생식물의 검박한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 그래서 국립수목원 내 희귀특산식물보존원이 ‘나만의 시크릿가든’이다. 보존원 내 울릉도 분원에는 만병초가 피어있다. ‘만 가지 병을 치유하는 풀’이라고 했던가. 정자(퍼골라)에 올라 울릉도 희귀특산식물인 두메부추와 섬시호 등을 바라본다.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고 했던 풀…. . 오월의 국립수목원은 삶의 소중함과 의지를 일깨운다.

섬개야광나무와 섬노루귀 등 울릉도 희귀특산식물들을 볼 수 있는 국립수목원 희귀특산식물보존원. 포천=김선미 기자


★금강산도 식후경: 국립수목원 직원들의 추천 맛집


⓵광릉불고기: 불고기만큼 밑반찬에 대해서도 호평.
⓶동이손만두: 건강한 맛의 만두전골. 무한정 리필 물김치도 인기.
⓷모심: 봉선사 근처의 손두부 요리 전문점.
⓸하마네추어탕: 고모리 추어탕 맛집.
⓹어반제주: 고모리 저수지 인근 제주 감성의 피자·파스타집.




포천=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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