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 내린 백록담 비경 보름새 절반 사라지는 이유는 [디지털 동서남북]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5월 10일 15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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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수자원 관리 고도화 필요

동아일보 사회부에는 20여 명의 전국팀 기자들이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지역의 생생한 목소리를 찾기 위해 뛰고 있습니다. 전국팀 전용칼럼 <동서남북>은 2000년대 초반부터 독자들에게 깊이있는 시각을 전달해온 대표 컨텐츠 입니다. 이제 좁은 지면을 벗어나 더 자주, 자유롭게 생생한 지역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디지털 동서남북>으로 확장해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지면에 담지 못한 뒷이야기, 잘 알려지지 않은 따뜻한 이야기 등 뉴스의 이면을 쉽고 빠르게 전달하겠습니다. -편집자주

9일 오전 한라산 관음사탐방로 해발 1650m 왕관능 주변에 설앵초가 수줍은 새색시마냥 연보랏빛 꽃망울을 터뜨렸다. 한라산 고지대에 봄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전령이다. 고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양치식물인 다람쥐꼬리도 긴 겨울을 뚫고 솟아났고, 한라산 특산 상록수인 구상나무도 새로운 초록빛 잎과 함께 땅콩만한 붉은 꽃을 피웠다.

한라산 고지대에 1000㎜가 넘는 폭우가 쏟아진 이후 최정상인 백록담 분화구에 물이 가득한 비경을 염두에 두고 서둘러 산행을 하는 도중에 마주한 고지대 봄 풍경이었다. 어렵게 도착한 백록담 정상에 서자 시원스런 전경이 펼쳐졌고 발아래로는 물이 찬 분화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이 가득한 만수(滿水)의 장관을 기대했지만 어느새 많이 줄어든 뒤여서 다소 아쉬웠다.

한라산에 폭우가 쏟아진 후 백록담 분화구는 9일 오전 물이 찬 비경을 보여줬다.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3일부터 5일까지 해발 1600m인 한라산 삼각봉에서 측정된 강수량은 1013.0㎜이다. 해안지대인 제주시내에 148.7㎜가 내린 것에 비해 6~7배에 달하는 ‘물 폭탄’이 쏟아진 것이다. 이 폭우로 만수는 아닐지라도 분화구 바닥 70~80%가 찰 정도로 담수호를 이뤘는데 불과 3~4일 만에 상당량이 지하로 빠져나갔다. 분화구 바닥은 물이 쉽게 빠져나가는 화산 쇄설물인 스코리아(일명 송이), 모래 퇴적층 등으로 형성돼 담수를 오래 유지하기 힘들다. 보름가량 지나면 절반이상 줄어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백록담 담수가 만수라는 점을 이야기할 때 분화구 전체에 물이 가득한 것으로 오해하는 일이 많다. 백록담 분화구는 전형적인 산정화구호로 둘레 1700m, 최고 깊이 108m이고 바닥면적은 21만m²가량이다. 이 밑바닥 대부분이 빗물에 잠겼을 때를 만수로 본다. 1970년대까지 백록담 수심이 최고 8m가량으로 알려졌으나 분화구 사면에서 흙과 자갈이 계속 흘러내린 탓인지 2000년대 들어서는 태풍과 폭우가 쏟아졌을 때 수심은 3~4m 정도로 낮아졌다.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가 지나간 뒤 보여준 백록담 분화구 만수 장면.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한라산에 연속적인 폭우로 1000㎜이상 강수량을 기록하는 일은 드물지만 태풍이 지날 때 가끔 발생한다. 지난해 9월 태풍 ‘힌남노’가 제주와 한반도 동남부를 휩쓸고 지나면서 한라산 윗세오름 관측지점(해발 1666m)에는 1184.5㎜의 폭우가 내려 만수의 장관을 보여줬다. 2020년 9월에는 태풍 ‘마이삭’과 ‘하이선’이 연속으로 제주를 지나면서 한라산 백록담 남벽(해발 1700m)일대 누적 강수량이 1476.0㎜을 기록하기도 했다.

제주지역은 중심에 한라산(해발 1947m)이 우뚝 솟은 지형적 특성에 따라 고지대로 갈수록 강수량이 많아진다. 1991년부터 2020년까지 30년 동안의 강수량을 분석한 최광용 제주대 교수(지리교육) 자료에 따르면 제주시내인 건입동지역이 연평균 1518.5㎜인데 비해 윗세오름 관측지점은 5837.8㎜로 3.8배가량 차이가 났다. 뜨거워진 공기가 상승하면서 고지대의 찬 공기를 만나 구름을 형성하고 비가 내리는 산 날씨 특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엄청난 양의 폭우가 쏟아지면 저지대에서는 물난리가 날 법도 한데 제주지역은 잘 견딘다. 하천에 저류시설을 여러 군데 만들어 범람을 예방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화산섬이라는 지질 및 지형적 특성때문이다.

백록담을 중심으로 동서방향 지역으로는 투수성이 좋은 현무암류로 구성돼 빗물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용암 암괴에 형성된 숲을 일컫는 ‘곶자왈’은 이런 투수성을 잘 보여주는 지대인데 동서지역에 특히 발달했다. 남북으로는 하천을 통해 지하나 바다로 빗물이 빠져나간다. 제주지역은 140여개 하천 가운데 60개 가량이 법에 따라 관리를 받고 있는데 대부분 남북방향으로 흘러내린다. 평소에는 물이 없는 건천(乾川)이었다가 하루 50~80㎜이상이 내리면 하천 유출이 나타나는데 제주에서는 “내 터졌다”는 표현을 쓴다.

임재영 기자
임재영 기자
하천으로 모아진 빗물은 지하로 스며들거나 바다로 빠져나간다. 특히 한라산 고지대 하천에서 흐르는 빗물은 50%가량이 지하로 들어간다. 지하로 스며든 빗물은 화산토양과 암반틈새를 따라 수년, 수십년을 흐르다 산간 지대 샘물이나 해안의 용천수로 솟아난다. 이처럼 빗물은 지하로 스며들면서 오염물질이 제거된 청정 지하수자원이 된다. 빗물을 모은 ‘봉천수’(奉天水), 수량이 들쭉날쭉한 ‘용천수’(湧泉水)에 의지했던 물 걱정은 1970년대부터 지하수 개발이 이뤄지면서 말끔히 사라졌다.

한라산 고지대에 쏟아진 폭우는 지하로 스며들어 수십년을 흐르다 해안 저지대에서 샘물로 솟아난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지하수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연구와 조사를 거쳐 제주도는 지속이용가능한 양을 연간 6억5200만t으로 정했다. 4월말 현재 개발 허가된 지하수공(염지하수 제외)은 공공 1655개, 사설 3140개 등 모두 4795개에 이른다. 연간 허가량은 5억5910만t에 달해 지속이용가능량의 85.8%에 육박했다. 연간 허가량가운데 농어업용이 전체 가운데 55%인 3억816만t을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높다.

‘지하수는 제주의 생명수’라는 말이 명제처럼 굳어졌고 관리와 규제가 점차 강화됐지만 불안감은 여전하다. 낡고 오래된 지하수공이나 부실한 사용을 통해 농약, 분뇨 등 육상의 오염물질이 지하로 바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지하수로 이어지는 통로로 불리는 ‘숨골’ 주변의 오염물질 방류도 감시해야할 부분이다.

한라산에 내린 폭우는 다양한 영향을 미치는데 지하수 생성이라는 긍정적인 면을 이어갈 수 있도록 부존량, 지하수위 변동, 개발과 이용실태 등에 대한 지속적이고 고도화한 관리시스템을 갖춰야할 것이다.

제주=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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