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오후 강원 강릉시 해안로의 한 펜션이 전날 발생한 산불로 전소돼있다. 강릉=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왔어요. 그런데 다 타버리고 남은 게 하나도 없네요.”
12일 강원 강릉시 저동에서 만난 전문기 씨(28)는 전날 발생한 대형 산불이 덮쳐 전체가 까맣게 그을린 채 폐허가 된 펜션 내부를 뒤지다 한숨을 내쉬었다.
전 씨는 어머니와 함께 객실 8개 규모의 펜션과 편의점을 운영해 왔다. 특히 젊은층을 공략하기 위해 지난해 갖고 있던 전 재산을 털어 객실 내부 인테리어를 정비했고 TV와 냉장고도 새 제품으로 교체했다.
그런데 불과 1년 만에 전 씨는 화마에 펜션과 편의점을 모두 잃었다. 전 씨는 “펜션 내 장롱에 약 2000만 원 어치의 금붙이가 있었는데 장롱째 타 버렸다. 바닥을 긁어봤는데 금붙이가 10분의 1도 안 남았다”고 했다. 편의점 계산대에 있던 현금 200만 원도 화마에 삼켜졌다. 전 씨는 “산불 발생 후 10분도 안 돼 일대가 불바다가 됐다. 급하게 피하느라 지갑도 못 챙겨 친구들에게 교통비 식사비를 빌려 지내는 형편”이라고 했다.
전날 오전 8시 22분 경 강원 강릉시 난곡동 야산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주택 68채, 펜션 26채 등 건물 125곳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집계됐다. 불이 꺼진 후 집을 찾은 주민 상당수는 건물 형체조차 남지 않은 걸 보고 눈물을 삼켰다.
윤석열 대통령은 강릉시를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하고 “피해 주민이 신속하게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지원에 만전을 기하라”고 지시했다.
전날 오전 발생한 강릉 산불로 황급히 대피했던 주민들은 날이 밝자 삼삼오오 삶의 터전인 집과 가게로 향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주민들을 맞은 것은 매케한 연기 뿐이었다. 특히 동해안 대표 관광지로 꼽히는 경포호와 해안가에 펜션 등을 운영하던 이들은 “다음달 어린이날 연휴부터 여름철 휴가철까지 이어질 성수기가 코앞인데 앞으로 생계가 막막하다”며 한숨을 쉬었다.
● “성수기 앞두고 날벼락”
12일 오전 강원 강릉시 저동의 펜션들이 화재로 소실돼 있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대피소인 강릉 아이스아레나 체육관에서 잠을 잔 홍진주 씨(70·여)는 일어나자마자 난곡동에 있는 자신의 민박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민박집 객실 10개는 벽도 문도 대부분 사라진 다음이었다. 바닥에는 수도관이 터져 흘러넘친 물만 흥건했다. 홍 씨는 “남편과 민박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해 왔는데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지 막막하다. 화재보험도 안 들어서 당장 먹고 살 돈도 없다”며 눈물을 보였다.
특히 상인들 중에는 다음 달 어린이날 연휴부터 여름 휴가철까지 이어질 대목을 맞아 리모델링을 하거나 집기 등 교체한 경우가 상당수여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강릉시 경포대 인근 한 펜션 밀집 지역에서 만난 최모 씨(46)는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건물 앞에서 “5년째 운영해 온 서핑숍과 게스트하우스를 최근에 리모델링하고 서핑보드도 대거 들여왔는데 화재로 4억 원 넘게 손해를 봤다”고 하소연했다. 또 “관광객을 태우기 위해 정비를 마친 요트 2개도 모두 타 버렸다. 다음 달부터 서핑족이 본격적으로 찾아올 시즌인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안현동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김모 씨(35)는 “손님을 맞기 위해 주문해 놓은 상품이 모두 잿더미가 돼 버렸다”면서 입구부터 진열대 곳곳에 가득 찬 잔해를 치우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는 “인근 상인들이 모두 5월 이후 몰려오는 관광객들로 버티는 곳들인데 올해를 어떻게 보낼지 걱정”이라고 했다.
주민들 사이에선 경포호와 해변으로 이어지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산불로 초토화되면서 “대표적 관광 자원을 잃었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수십 년 동안 되풀이된 동해안 산불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던 소나무 숲이 이번엔 잿더미로 변해버렸다는 것이다.
간신히 화마를 피한 상인들 사이에서도 “올 여름 장사는 물 건너갔다”는 말이 나왔다. 안현동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권모 씨(66)는 “건물 외부는 양호한 편인데 강풍 때문에 잿더미와 쓰레기로 방들이 모두 찼다”며 “건물이 무사한 건 다행이지만 예약 손님 15팀이 모두 예약을 취소했다. 당분간 관광객이 찾지 않을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 “음식 나눠 주던 착한 어르신이 떠났다”
주민들 사이에선 이번 산불로 숨진 전모 씨(88)를 애도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 씨가 운영하던 펜션에서 1년 가까이 장기 투숙했다는 배모 씨(65)는 “고인이 교직 생활을 오래 하셨던 걸로 들었는데 인품이 훌륭한 분이었다”며 “반찬을 이웃들에게 나눠 주시던 따뜻한 분이었는데 황망하게 가신 게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배 씨는 전날 오후 5시경 불길이 잡히자 휴대전화를 챙기러 돌아왔다가 전 씨가 숨진 걸 처음으로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강릉=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 강릉=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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