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이밭, 벌통… 3대 가업 앗아간 작은 불씨 [디지털 동서남북]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14일 14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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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대 때부터 100년 이상 일궈온 송이밭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땅이 됐어요. 무너진 가업을 일으킬 희망조차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최근 경북 울진군 북면 검성리에서 만난 이모 씨(50)는 “작년 산불이 우리 산을 싹 다 태운 뒤로는 송이는 고사하고 잡초 새싹조차 구경하지 못했다. 다시 송이가 나기까지 50년 이상은 걸릴 것이다”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지난해 3월 4일 시작된 ‘경북 울진-강원 삼척’ 지역의 초대형 산불이 발생한지 1년이 지났지만 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재기를 꿈꾸지 못하는 상황이다.

경북 울진군 북면 검성리에서 이모 씨가 자신이 송이 채취일을 하던 집안 소유의 산을 가리키고 있다. 이 산에는 지난해 산불로 불타 죽은 나무만 남아 있다. 울진=명민준기자mmj86@donga.com
경북 울진군 북면 검성리에서 이모 씨가 자신이 송이 채취일을 하던 집안 소유의 산을 가리키고 있다. 이 산에는 지난해 산불로 불타 죽은 나무만 남아 있다. 울진=명민준기자mmj86@donga.com
당시 발생한 산불은 이 씨 집안 소유의 산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씨는 불이나기 전까지 이 산에서 3대째 송이 채취일을 해왔다. 자랑스레 여겨온 가업은 산불로 인해 이 씨 대에서 끊기게 됐다. 30년 이상 산사람으로만 살아오던 이 씨는 최근 생전 처음으로 경비일을 시작했다. 이 씨를 따라 산에 오르던 20대 초반의 아들도 가업 승계의 꿈을 버리고 얼마 전부터 새 진로를 찾기 시작했다.

베테랑 약초꾼 박모 씨(62)는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절벽에 목숨을 내걸고 희귀약초부터 야생버섯까지 따오던 박 씨는 어느 험준한 산보다 생계 위협이 훨씬 두렵다고 했다. 울진 여러 산을 돌며 약초를 캐오던 그는 지난해 산불 이후 생업이 끊겼다. 대학생 자녀들은 당장 밀린 공과금과 빚을 갚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자식에게 손 벌리지 않으려 노구를 이끌고 양봉일을 해온 장모 씨(75)는 애지중지 키우던 벌 100통을 지난해 산불 때 모두 잃었다. 최근 다시 마음을 잡고 양봉일을 시작했으나 산불 피해지역에서 벌 키우기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다. 장 씨는 사실 자식들 걱정에 양봉일도 하는 척만 하는 거라고 했다. 그는 “지난겨울에는 생활비가 부족한 상황에 난방비까지 올라 어느 때보다 서글픈 겨울을 보냈다”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산불은 주민들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하지만 사소한 부주의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경북소방본부에 따르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5년 동안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 및 들불 등 봄철 화재 3899건 가운데 1933건이 부주의로 인한 화재였다. 유형별로는 담배꽁초가 487건으로 가장 많았고 쓰레기 소각이 421건으로 뒤를 이었다.

사소한 부주의에서 시작하는 만큼 산불은 책임소재를 따지기도 힘들어 피해자들의 상처를 더욱 키운다. 지난해 울진·삼척 대형화재를 일으킨 피의자도 운전 중 담배꽁초를 바깥으로 버린 것이 도로변과 가까운 야산에 불이 붙어 산불로 이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경찰과 산림당국은 여전히 범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한 경북도는 최근 산불의 원인이 되는 소각행위나 등산시 인화물질 소지 등의 각종 행위를 금지하는 행정명령을 발령했다. 8일 단속을 시작해 13일까지 11건을 적발해 과태료 264만 원을 부과한 상황이다. 경북도 관계자는 “단속만으로는 산불을 원천적으로 막기 어려운 실정”이라고 말했다.

산불 예방을 위해선 주민들과 등산객들의 적극적인 협조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주민과 등산객 모두가 산불 예방의 파수꾼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명민준 기자
명민준 기자
지난해 울진·삼척 산불이 태운 산림은 서울 면적의 약 27%인 1만6302㏊에 달한다. 역대 최대면적의 피해를 일으킨 2000년 동해안 산불때는 2만3794㏊의 산림이 불에 탔다. 축구장(1개=약 0.7ha)의 1만배가 넘는 광활한 피해 구역에는 언제든지 내 이웃이나 가족이 있을 수 있다. 더 이상 작은 불씨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되는 이유다.

울진=명민준기자 mmj86@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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