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해열제 찾기도 힘들어”…의약품에 표기된 점자 절반이 ‘엉터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3월 2일 12시 32분


서울 시내 한 약국에서 판매 중인 점자 도입 안전 상비약. 2023.02.15. 뉴시스
서울 시내 한 약국에서 판매 중인 점자 도입 안전 상비약. 2023.02.15. 뉴시스
시각장애인 이모 씨(34)는 얼마 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확진돼 재택치료를 하던 중 해열진통제를 복용하려고 했다가 크게 당황했다. 의약품 박스에 점자로 제품명이 표기돼 있었지만 점자의 높이가 너무 낮아서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씨는 “급하게 약이 필요한 상황에서 곤란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국내 유통 중인 의약품에 표기된 점자가 절반 가까이 시각장애인들이 읽을 수 없는 ‘엉터리 점자’인 것으로 조사됐다. 내년 의약품 점자 표기 의무화를 앞두고 점자의 가독성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보완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있으나 마나’한 점자들


의약품에 점자 표기를 의무화하는 약사법 개정안이 지난해 국회를 통과하면서 내년 7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점자 표기 의무화만큼 중요한 건 점자의 가독성이다. 점자는 점의 높이와 간격이 표준 규격에 맞아야 실제로 시각장애인들이 읽을 수 있다. 점자의 높이가 너무 낮거나, 간격이 제멋대로면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없는 ‘있으나 마나’인 점자인 셈이다.

더불어민주당 강선우 의원이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제출받은 연구용역 보고서 ‘22년 의약품 안전정보 장애인 접근성 개선 사업’에 따르면 국내 유통 중인 76개 의약품 중 절반 가까이는 가독성이 낮은 엉터리 점자였다.

연구팀은 점역교정사 자격증(일반 문자를 점자로 번역하교 교정하는 사람)을 소지한 시각장애인 5명을 통해 76종 의약품 점자의 가독성을 상, 중, 하로 평가했다. 그 결과 ‘하’를 받아 무슨 점자인지 전혀 읽을 수 없는 제품이 33개로 43%에 달했다. 34개(45%)의 가독성은 ‘중’으로 애매한 점자였다. 시각장애인 손의 민감도에 따라 누군가는 읽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읽지 못하는 점자라는 의미다. 가독상 ‘상’을 받은 의약품은 76개 중 9개(12%) 뿐이었다.

● 단순 불편 넘어 시각장애인 약물 오남용 우려로
가독성이 떨어지는 점자는 시각장애인의 불편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약물 오남용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시각장애인 최모 씨(42)는 “의약품은 냄새도 나지 않고 (포장지) 모양도 대부분 비슷해 구분하기가 어렵다”며 “의약품을 구매하고 나면 개인적으로 점자 스티커를 따로 붙여놓는다”고 말했다. 40대 시각장애인 노모 씨도 “갑자기 화상을 입거나 상처가 생겼을 때 연고를 찾아서 바르려고 해도 점자가 너무 미약하게 새겨져 있어서 곤란하다”고 전했다.

내년 의약품 점자 표기 의무화를 앞두고 점자 가독성에 대한 제도적 보완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강 의원은 “가독성이 떨어지는 점자로 인해 시각 장애인들의 건강과 생명이 위협받는 상황”이라며 “시각장애인들이 불편함 없이 약품을 선택하고 구매하는 권리가 지켜질 수 있도록 정부가 법적, 제도적 장치 마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관계자는 “제대로 된 점자 표기는 장애인의 ‘자립’으로 이어진다”며 “장애인이 독립적 인격체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