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17년차, 위례 인생학교 교장 백만기[서영아의 100세 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10월 24일 07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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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생2막]“은퇴 준비, 서둘수록 노후가 풍요로워집니다”


수업이 끝난 뒤 위례스토리박스 조형물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만기 교장(앞)과 수강생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수업이 끝난 뒤 위례스토리박스 조형물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백만기 교장(앞)과 수강생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장외투자, 모두 관심 많으시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창업하는 회사의 5년 뒤 살아남는 비율이 20%에 불과하다는 거 아세요? 장래성을 따지지 않고 투자한다면 리스크가 무척 크다는 얘기가 됩니다. 이처럼 가능성이 희박한데도 사람들이 투자하는 이유는 뭘까요….”

12일 오후 2시 경기 성남시 수정구 위례스토리박스. 쨍한 노란색을 기조로 한 콘테이너박스 건물군속 한 교실에 두툼한 책을 든 사람들이 모여든다. 대부분 50대인 학생 4명이 발제와 토론을 하면 이를 지켜보던 백만기(69) 교장이 가끔 끼어들어 진행을 돕고 전문적인 설명을 해준다. 교재는 ‘가치투자의 아버지’로 알려진 벤자민 그레이엄의 저서 ‘현명한 투자자’. 위례인생학교 ‘금융투자’ 수업현장이다.

“수업은 참여자 모두가 만들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강사가 학생이 되고, 학생이 다시 선생이 되기도 하는 수평적인 시스템이죠.”

실제로 이 수업에 학생으로 참여한 오정선 씨는 앞 시간 생활영어 수업에서는 강사였다. 오랜 해외생활 뒤 귀국해 도서관과 문화센터 등에서 영어교육 자원봉사를 많이 한단다.

○‘어른들을 위한’ 두번째 인생학교가 출범하다


백 교장은 사실 분당아름다운인생학교 교장으로 더 알려져 있다. 영국 평생교육기구인 U3A(University of the 3rd Age)의 철학을 바탕으로 시민이 운영하는 자율학교 개념을 도입해 ‘아름다운 인생학교’를 2013년 분당에 열었다. 지난해 8월 개교한 위례학교는 두 번째 인생학교가 된다.

“분당 학교는 이제 궤도에 올랐으니 다른 분께 넘겼습니다. 제 꿈이 인생학교를 100개 만드는 것인데 이제 겨우 두 번째 학교를 시작한 겁니다. ‘어른들을 위한 학교’인 인생학교가 인생 2막을 맞은 이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합니다.”

월 1만 원 운영회비만 내면 3과목까지 수강할 수 있다. 가을학기에는 생활영어 금융투자 심리학 포토에세이 우쿨레레 등 10개 강좌가 개설됐고 문화답사 등 야외강좌도 있다.

“내 지식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하고, 다른 사람의 지식은 내게 필요합니다. 사회에서 받은 것이 많아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지혜를 옆 사람과도 나눠야겠다는 생각인 분들이 인생학교에 찾아오십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찾는 퇴직자, 젊은 시절 로망인 악기 배우기를 이곳에서 시작한다는 60대 등 각자의 사연은 다양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눈다는 자세는 모두가 같다.

금융투자 수강생들과 토론하는 백 교장. 수강생은 모두 50대로 다른 수업에서는 강사를 겸하는 경우도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금융투자 수강생들과 토론하는 백 교장. 수강생은 모두 50대로 다른 수업에서는 강사를 겸하는 경우도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인생 2막”


백 교장은 50대 초반 ‘자발적’으로 은퇴한 뒤 인생 1막에서 막연하게 꿈꾸던 많은 일에 도전했다. 고전음악카페를 운영하기도 했고 분당FM방송 진행자로 일했다. 성당교우들과 밴드를 결성해 정기 콘서트를 열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낭독봉사를 했고 호스피스 전문과정을 이수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의 종착지가 인생학교인 듯하다.

“은퇴 직후 성남아트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했는데 굉장한 경력을 가진 분들이 자원했다가 단순 역할에 실망하고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그 무렵 영국 U3A를 알게 됐어요. 은퇴를 앞뒀거나 이미 은퇴한 시니어들의 대학입니다. 정부 보조 없이 회비만으로 다양한 강좌가 이뤄지는데, 학교 운영위원과 강사가 모두 자원봉사자였습니다. 2012년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가 개최한 ‘은퇴 후 8만시간’ 에세이 공모전에 영국 U3A처럼 어른들을 위한 학교가 우리 사회에도 필요하다는 주제로 응모해 대상을 받았습니다.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2013년 분당 수내동에 오피스텔 하나를 빌려 개교했죠.”

U3A는 인생주기를 크게 만 24세 이하, 25세~49세, 50세~74세, 75세 이상의 4시기로 구분한다. 제1기는 학령기, 제2기는 사회활동기, 제3기는 은퇴 후, 제4기는 임종기인데, U3A는 보다 풍요로운 제 3기를 위한 대학인 셈이다.

가족 친지 모두가 ‘영국에서나 가능한 얘기지, 우리나라에선 안 된다’고 말렸다. 하지만 그의 생각엔 사회에 꼭 필요한 커뮤니티였다. 성남아트센터 때 인연을 맺은 봉사자들도 강사로 초빙할 수 있었다. 그 뒤 분당인생학교에서 교장 역할뿐 아니라 우쿨렐레 강사, 웰다잉 강사, 금융교육 강사 등으로도 맹활약했다. 분당학교는 2018년 사회공헌 차원에서 공간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해온 한 백화점내로 자리를 옮겼다.

백 교장은 은퇴 이후 10여 년 간 성당 교우들과 밴드를 결성해 정기적으로 하우스콘서트를 열어왔다. 밴드와 함께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백만기 교장. 백만기 씨 제공
백 교장은 은퇴 이후 10여 년 간 성당 교우들과 밴드를 결성해 정기적으로 하우스콘서트를 열어왔다. 밴드와 함께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백만기 교장. 백만기 씨 제공


○“전국에 인생학교 100개쯤 생긴다면…”


그의 요즘 꿈은 한국 전역에 시민이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인생학교를 100개쯤 세우는 것이다. 영국의 U3A는 전국에 1000개, 소속 회원만 40만 명이 될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르다. 오로지 은퇴자들이 자율적으로 서로를 가르치고 교류하는 지역 대학이 이렇게 많다는 얘기다. 초고령 사회를 앞두고 급증하는 시니어들의 인생2막을 준비해야 하는 우리 사회에도 시사점이 크다.

말 나온 김에, 그는 한국 현실에서 인생학교 등 시민의 자율활동을 가장 어렵게 하는 요인으로 공간문제를 들었다. 사회에 공간은 남아도는데 지역이기주의나 부처이기주의 탓에 활용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전에 판교의 초등학교 교사가 학령아동이 줄어 남는 공간에서 인생학교 같은 수업을 진행하면 어떻겠느냐며 저를 찾아온 적이 있어요. 그 뒤 알아보니 정년을 얼마 앞둔 교장이 반대해 못했다고 합니다. 지자체나 공공기관, 구청, 도서관 등에서 시민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면, 예산 없이도 시민들이 자체적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데 안타깝습니다.”

일본에서는 인구감소로 빈 교실을 활용해 보육원이나 지역 문화교실 등을 개설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전국에 지자체별로 산재한 경로당 공간을 세대융합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은 없을지도 생각해봄직 하다.

백씨는 은퇴 이후 한때 클래식 카페를 운영하기도 하고 분당 FM방송의 디제이로도 일했다. 사진은 시작장애인을 위한 도서낭독 봉사중인 백씨. 백만기 씨 제공
백씨는 은퇴 이후 한때 클래식 카페를 운영하기도 하고 분당 FM방송의 디제이로도 일했다. 사진은 시작장애인을 위한 도서낭독 봉사중인 백씨. 백만기 씨 제공


○‘은퇴는 기획하는 것’


-50세 은퇴를 목표로 한 이유는 뭔가요.

“제가 1970년대 학번인데 당시 한국남성의 평균수명이 60세가 되지 않았습니다. 금융회사에서 자산운용 업무를 했는데 40이 됐을 때 ‘이렇게 일만 하다가 생을 마칠 수는 없다, 50에 은퇴하자’고 목표를 세웠지요. 은퇴 뒤에는 해야 할 일이 아닌,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겠다는 생각이었죠. 50세 은퇴를 목표로 하니 할 일이 눈에 보였습니다. 우선 경제적 자립을 해야겠다, 둘째 은퇴 후 할 일을 찾자.”

-‘준비된 은퇴’ 이후 삶에 대한 자평하신다면?

“제가 좋아하는 19세기 폴란드의 시인 치프리안 노르비트는 행복한 인생을 위해서는 먹고사는 일, 재미있는 일, 의미있는 일의 세가지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셋 중 하나가 부족하면 삶은 드라마가 되고 두가지가 부족하면 비극이 된다고요. 먹고사는 일로는 은퇴 무렵 친구 3명과 주식투자클럽을 결성하여 16년째 매달 두 번씩 만나 주식 운용을 협의 중입니다. 재미있는 일로는 동네 이웃과 밴드를 결성해 정기 하우스 콘서트를 열어왔고 글쓰기도 짬짬이 하고 있습니다(저서 2권을 냈다). 의미있는 일로는 성남아트센터 자원봉사, 시각장애인 도서낭독 봉사, 인생학교 설립을 들 수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개인적으로는 그런대로 살아왔으나 우리 사회에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느낍니다.”

그는 슬기로운 은퇴생활의 비결은 ‘미리 준비하고 기획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가 은퇴준비는 언제부터 해야 하냐고 묻기에 고1 때부터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것과 고3 때부터 하는 것과 어느 것이 유리하냐고 반문했더니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은퇴 준비를 일찍 할수록 좋은 이유는 복리의 마술을 이해하면 알 수 있습니다.”

벤자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를 교재로 금융투자 수업 중인 백교장과 학생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벤자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를 교재로 금융투자 수업 중인 백교장과 학생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지금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 금융교육과 죽음교육”


인생 2막 17년차. 오랜 은퇴생활을 통해 그는 요즘 한국인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두 가지 교육이 결여돼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금융교육과 죽음교육이다.

“모두 돈을 버는 데만 몰두할 뿐, 돈을 모으고 지키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금융사에서 20년 이상 자금 운용을 담당했는데 학교를 운영하며 회원들을 보니 금융에 대해 너무 몰라요. 다른 분야는 전문가 수준인 분들도 그렇더군요. 전 미연준위원장 앨런 그린스펀은 ‘문자 문맹은 생활이 불편할 따름이지만 금융 문맹은 생존이 달린 문제’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은퇴자가 평생 모은 돈을 금융사 직원 권유로 사모펀드에 넣었다가 큰 손실을 봤다는 뉴스가 흔하죠. 그래서 인생학교에서라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6개월 과정 교육을 6회 정도 진행했죠.”

이런 그는 한국인의 금융이해도가 낮은 근본 원인은 ‘교육’에 있다고 진단한다.

“세계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는 유태인의 비결은 조기금융교육이예요. 그들은 만 13세가 되면 ‘바르미츠바(Bar Mitzvah)’라는 성인식을 거행하는데, 이때 친인척들이 금일봉을 선물합니다. 중산층의 경우 4만~5만 달러(4700~5900만 원) 정도 된다는데, 대신 아이는 친인척들 앞에서 그 돈을 앞으로 어떻게 운영할지 발표해야 합니다. 미리 부모로부터 자금 운용에 대한 밥상머리 교육을 받지요.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이면 그 돈이 작은 회사 하나 창업할 수 있는 종잣돈이 됩니다. 만약 그 학생이 세계적인 금융회사에 입사했다고 칩시다. 한국학생도 공부를 잘해 그 회사에 들어갔고요. 누가 자금 운용을 잘하겠습니까.”

은퇴자들은 금융을 알면 금융회사의 공포마케팅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다.

“노후 필요한 자금으로 7억, 10억 운운하는데 듣지 마세요. 자산을 금융사에 맡겨 알아서 운용해줄 것을 기대하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금융사 직원들은 고객보다 회사 이익을 우선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현금흐름’입니다. 요즘 직장 은퇴자 대부분은 국민연금 월 100만 원 정도는 확보하고 있죠. 여기에 주택연금을 활용하면 월 200만 원 정도 현금 흐름은 마련할 수 있어요. 자산운운용은 스스로 공부부터 하세요. 또하나,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는 것도 돈버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가져옵니다.”

○인생2막 ‘죽음’에 대한 공부 필요해


-죽음교육은 무슨 말씀인지요.

“2009년 국립암센터에서 호스피스 전문과정을 이수했는데, 제가 평생 받은 교육 중 가장 유익했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가치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았고 자연스레 인생관이 변하게 됐어요. 죽음 공부야말로 인생 2막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공부입니다. 하지만 주변에선 별로 공감하지 않더군요. 친구들 모임에서 꺼내면 ‘왜 재수 없게 그런 이야기를 하냐’며 타박하죠. ‘(죽음이) 닥치면 의사에게 맡기면 되지 않느냐’면서요.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죽음을 통고받으면 어쩔 줄 몰라하며 황망하게 떠나는 분이 많습니다. 죽음은 해외여행보다 중요한 일 아닌가요.”

-인생학교에 ‘웰다잉’ 교육을 개설했는데 별로 인기가 없었다고요. 왜일까요.

“죽음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견해가 팽배해서 그렇다고 봅니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란 세익스피어의 연극도 있고 ‘유종의 미’라는 우리 속담도 있듯 삶도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백교장은 2009년 국립암센터에서 호스피스 전문과정을 이수했다. 이때의 경험이 평생 받은 교육중 가장 유익했다는 그는, 죽음에 대해 그저 기피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풍조에 대해 걱정이 많다. 백만기 씨 제공
백교장은 2009년 국립암센터에서 호스피스 전문과정을 이수했다. 이때의 경험이 평생 받은 교육중 가장 유익했다는 그는, 죽음에 대해 그저 기피대상으로만 생각하는 풍조에 대해 걱정이 많다. 백만기 씨 제공


백만기 씨 프로필
1952년생. 성균관대 경제학과 졸업. 대한투자금융 등 금융회사에서 26년간 일하다가 50대 초반 자발적 은퇴. 그 후 분당에서 고전음악카페 운영. 분당FM방송 진행자 활동, 성남아트센터 자원봉사. 성당교우들과 밴드 결성해 정기 콘서트.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낭독봉사. 분당인생학교 교장, 현재 위례인생학교 교장


※‘100세 시대’, 우리는 얼마나 준비돼 있을까요. ‘서영아의 100세 카페’에서 그 답을 찾아봅니다. 풍요로운 인생 후반전을 위해 준비할 것, 생각해볼 것, 알아둘 것 등 다양한 메뉴로 찾아뵙겠습니다. 격주로 실리는 ‘이런 인생 2막’ 코너에서는 멋진 인생 2막을 만들었거나 준비하는 독자 사례를 소개합니다.


서영아 기자 sy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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