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멈춘지 두 달만 속행 공판 열려
양승태 "예단이 객관적 관찰 방해 우려"
'한동훈 수심의' 사례 언급하며 방어 논리
변호인 "대법원장, 공소사실의 직권 없어"
박병대 "검찰 주장은 침소봉대, 견강부회"
고영한 "예단 말고 증거주의에 따라 판단"
사법농단 혐의로 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두 달 만에 열린 재판에서 “이른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의 광풍(狂風)이 사법부까지 불어왔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1부(부장판사 이종민·임정택·민소영)는 7일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등 혐의로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 외 2명의 122차 공판을 진행했다.
이날 재판은 지난 2월5일 공판이 속행되고 추후지정된 지 2개월 만에 재개되는 것이다. 그 사이 형사합의35부는 부장판사 3인으로 구성되는 대등재판부로 바뀌었고 재판부 구성도 모두 변경됐다.
재판부 구성이 바뀜에 따라 갱신 절차를 진행한 이날 재판에서 직접 발언 기회를 얻은 양 전 대법원장은 “우리 피고인들이 우려하는 것은 예단에 관한 것”이라고 말문을 뗐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른바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의 광풍이 사법부까지 불어왔다”면서 “그 과정에서 자칫 형성된 예단이 객관적 관찰을 방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우리 사법부가 가장 경계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얼마 전 검찰 고위 간부 한 분이 모종의 혐의로 수사를 받게 되자 수사심의위원회 소집을 요구하며 ‘수사상황이 시시각각 유출되고 수사 결론이 계속 제시되는 상황에서 공정한 수사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얘기했다”고 말했다.
이는 한동훈 검사장의 ‘검·언유착 의혹’ 수사심의위 발언을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당시 수사심의위 소집은 한 검사장이 요청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 검사장은 직접 나가 발언했고 수사심의위는 수사 중단과 불기소를 권고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 사건이야말로 당시 수사과정에서 쉬지 않고 수사상황이 보도됐다”며 “그런 과정에서 모든 정보가 왜곡되고 마구 재단돼 일반인들에게는 ‘저 사람들이 상당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젖어 들게 만들었다”고 토로했다.
공교롭게도 한 검사장은 ‘사법농단’ 수사를 일선에서 지휘하며 양 전 대법원장의 구속까지 이끌어냈는데 양 전 대법원장이 자신의 방어 논리로 한 검사장 사례를 언급한 것이다.
양 전 대법원장은 “이제 광풍이 다 할퀴고 지나간 자국을 보면 ‘이게 왜 이렇게 된 건가’ 살피는 상황에서도 과거에 형성된 예단이 객관적 판단을 방해할 수 있다는 점을 저희들은 매우 걱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새로운 재판부가 이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사건의 실질적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정확하게 판단해주길 바란다”고 마무리했다. 이날 재판에서 양 전 대법원장 측 변호인은 대법원장에게 재판 개입 권한이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치며 검찰의 공소사실을 재차 부인했다.
재판이 멈춘 사이 나온 ‘사법농단 첫 유죄’ 판결에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있으나 권고 이상 지적을 할 경우 권한 남용에 해당하는 위법이라고 판단한 것을 부정하는 취지로 보인다.
이날 양 전 대법원장 측 변호인은 “기본적으로 법원행정처의 대법원장에 대한 일반적 보고체계가 없고 양 전 대법원장은 공소사실과 같은 직권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 “대부분의 사법행정에 있어서 대법원장은 결재를 안 한다. 대법원장 승인이 없으면 사법행정을 못 하는 게 아니다”라며 “행정처 사무직원들이 정기적으로 대법원장에게 행정처 업무 보고하는 일반적 업무체계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재판 개입과 관련해 아무리 대법원장이라 하더라도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할 수 없고 대법원장이 재판 심리 과정에 개입하는 행위에 소속 법관이 복종해야 할 의무는 없다”며 “이를 전제로 한 검사 주장은 이유 없다”고 강조했다.
양 전 대법원장 측 변호인은 상고법원 도입과 강제징용 손해배상 재판 개입 등 개별적인 공소사실에 대해서도 보고받거나 지시한 적 없다며 직권남용죄 성립을 부인하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박병대 전 대법관도 이날 직접 발언 기회를 얻어 “이 사건이 세상에서 논란이 되고 수사 진행 과정에서 제시된 프레임은 2가지”라며 “처음에는 사법부 내 비판적 법관들을 탄압하기 위한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박 전 대법관은 “그러나 법원 내부 조사부터 그런 리스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확인되자 정치적 사건 재판에 개입·거래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이른바 ‘사법농단’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검찰 주장이 얼마나 기교적인 형식 논리로 구성됐고 침소봉대(針小棒大·바늘만 한 것을 몽둥이만 하다고 말함)와 견강부회(牽强附會·말을 억지로 끌어 붙여 자신에게 유리하게 함) 돼 있는지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고영한 전 대법관 역시 “공소사실에서 유독 여러 목적이 장황하게 설시한 것이 눈에 띈다”며 “남용의 위법부당성을 설명하고자 한 걸로 보이는데 평가라는 건 평가자의 성향이나 보는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직접 발언했다.
고 전 대법관은 “새로 구성된 재판부에서는 추측이나 예단에 입각해 판단하지 말고 형사법의 엄격한 증거재판주의 원칙에 따라 판단해줄 것을 당부한다”고 밝혔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