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툼 대신 정이 싹트는 동네로… 낙후된 아파트의 ‘살맛나는’ 변신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2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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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혁신, 공간복지] <2> SH공사 ‘공간닥터 프로젝트’

낡은
 시설로 일부 주민들의 음주·흡연 장소였던 가양4단지아파트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간은 올 초 ‘가양 공동체 마당’(왼쪽 위 사진)으로 
탈바꿈했다. 새 운동기구와 놀이시설을 설치하자 주민들이 단지 내에서 가장 즐겨 찾는 공간이 됐다. 아래와 오른쪽 사진은 주민들이 
단지를 벗어나지 않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둘레길과 놀이터를 새롭게 리모델링한 중계목화4단지아파트의 모습.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낡은 시설로 일부 주민들의 음주·흡연 장소였던 가양4단지아파트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간은 올 초 ‘가양 공동체 마당’(왼쪽 위 사진)으로 탈바꿈했다. 새 운동기구와 놀이시설을 설치하자 주민들이 단지 내에서 가장 즐겨 찾는 공간이 됐다. 아래와 오른쪽 사진은 주민들이 단지를 벗어나지 않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둘레길과 놀이터를 새롭게 리모델링한 중계목화4단지아파트의 모습.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하루에도 몇 번씩 경찰이 출동하던 곳인데…. 신기하게도 술 먹고 난동 부리던 일이 아예 없어졌어요.”

27일 오전 10시 서울 강서구 가양4단지아파트에서 만난 박순우 씨(67)는 몇 달 새 달라진 동네의 모습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15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박 씨는 매일 아침 ‘가양 공동체 마당’에 나와 운동을 하는 것으로 아침을 연다. 박 씨는 “예전엔 술 먹고 담배 피우던 사람들이 모여서 이곳에서 자주 싸우곤 했다”며 “지금은 놀이터에 아이들이 나와 놀고, 주민들이 운동하러 나오니까 그런 일이 생기질 않는다”고 말했다.

○ ‘공간복지’ 통해 삶의 질 변화


올 초 새로 단장한 가양 공동체 마당은 원래 주민들에겐 기피 공간이었다. 낡은 운동 기구가 여기저기 방치돼 있었고 빽빽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주변은 늘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이들이나 여성은 물론이고 젊은 사람들조차 찾기 꺼려했다. 대낮부터 일부 주민들이 술판을 벌이고 다툼이 나서 경찰이 출동하는 게 예사였다고 한다. 김춘호 관리소장은 “취객 난동 때문에 경찰이 하루에도 두세 번씩 오고 그랬다”며 “시설을 싹 바꾸고 난 다음에는 주민들의 이용이 늘어나고 경찰이 오는 일도 없어졌다”고 설명했다.

가양4단지아파트 단지 리모델링 작업은 지난해부터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공간닥터 프로젝트’의 하나로 진행됐다. 개인에게 직접 제공하는 복지 대신, 장소를 개선해 여러 사람이 함께 ‘공간복지’를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기초수급생활자, 장애인 등 취약계층이 많이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시설 등을 개선해 열악한 주거에서 오는 박탈감을 해소하는 게 목적이다. 가양4단지아파트 공간닥터를 맡은 홍경구 단국대 교수는 “환경이 사람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는 ‘환경결정론’처럼, 사는 공간이 개선되면 사람의 태도와 인식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이 프로젝트의 시작점”이라고 설명했다.

○ 단지 안 놀이터·둘레길에서 여가 활동 만끽

같은 날 오후 3시 서울 노원구 중계목화4단지 아파트 놀이터에선 열한 살 동갑내기 어린이 4명이 번갈아 가며 시소를 타고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의 놀이 터전이 된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칠이 다 벗겨진 미끄럼틀과 낡은 철봉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비 오는 날엔 수십 년간 땅속에 묻어 놓은 건설 폐기물이 흙 위로 드러나 아이들이 다치는 일도 빈번했다. 이예나 양(11)은 “예전엔 놀이기구에 거미줄이 있어서 놀이터 오기가 싫었다”며 “크고 깨끗한 미끄럼틀과 시소가 생겨서 친구들과 놀기에 너무 좋다”고 말했다.

이 단지의 공간 닥터는 최혜영 성균관대 교수가 맡았다. ‘단지를 벗어나지 않고도 다양한 여가 활동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자’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여러 차례 답사를 하고 주민들과 만나 서로 의견을 주고받은 끝에 단지 안에 어린이 놀이터 4곳을 새롭게 꾸몄다.

어르신들의 산책로 ‘목화마을 둘레길’도 새롭게 만들었다. 흙길로 돼 있던 둘레길은 나무판을 깔아 걷기 편하게 조성했다. 풀만 무성해 단조롭던 길엔 쉬어 갈 수 있는 의자를 놓고 꽃과 풀을 심었다. 둘레길을 산책하던 김모 씨(87)는 “끝에서 끝까지 내 걸음으로 600걸음 정도 된다”며 “두어 번 왔다 갔다 하면 운동이 되어 자주 나온다”고 했다. 최 교수는 “공간 개선을 통해 주민들이 아파트 단지 안에서 다양한 여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 ‘소통의 장’ 통해 이웃 간 애정·신뢰 회복


SH공사가 선정한 ‘공간닥터 프로젝트’ 시범 단지는 모두 4곳. 앞서 소개한 △가양4단지 △중계목화4단지, 그리고 현재 시공 중인 △월계사슴2단지 △방화11단지다. 각 단지를 담당한 공간닥터들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물리적인 환경을 개선함과 동시에 이웃 간 신뢰를 회복하는 데 많은 고민을 했다. 주민들이 주거 빈곤에서 오는 박탈감을 해소하고 사는 동네에 애정을 갖게 하려면 함께 사는 이웃에 대한 애정과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이유에서다.

이를 위해 단지마다 ‘이웃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 가양4단지에선 그간 사용되지 않던 통합 경비실 4곳을 커뮤니티를 위한 시설로 탈바꿈했다. 방화11단지는 유휴공간으로 낭비되던 아파트 출입구를 주민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평상 쉼터’로 꾸몄다. 월계사슴2단지는 주민센터 옥상을 증축해 다목적 용도의 자치공간으로 만들었다.

월계사슴2단지 공간닥터를 맡은 원정연 고려대 교수는 “주민들이 자랑스럽게 ‘우리 아파트’ ‘우리 단지’라 소개할 수 있으려면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는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며 “공용 공간이 생기면 주민들 간 교류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주민들을 ‘우리’로 묶어줄 수 있는 무형의 무언가도 생겨날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easyhoon@donga.com


#sh공사#공간닥터 프로젝트#공간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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