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 대피’ 구례 소 5마리 결국 죽어… 농민들 “마음 무너져”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8월 18일 03시 00분


물난리 양정마을 소 37% 잃어… 파상풍-폐렴 등 후유증 앓기도
수의사 정기영씨 무료 진료 봉사

수의사 정기영 씨가 10일 전남 구례군 구례읍 양정마을에서 섬진강 범람에도 살아남은 소를 보살피고 있다. 구례=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수의사 정기영 씨가 10일 전남 구례군 구례읍 양정마을에서 섬진강 범람에도 살아남은 소를 보살피고 있다. 구례=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지붕에서 내려온 소 5마리가 죽었습니다. 너무 안타깝네요.”

17일 전남 구례군 구례읍 양정마을 주민 김모 씨(29)가 고개를 떨궜다. 7일 내린 폭우로 섬진강 물이 넘쳐 지붕 위로 몸을 피했다가 극적으로 구조됐던 소 가운데 5마리가 얼마 전 폐사했기 때문이다.

당시 축사가 물에 잠기면서 소 떼가 물속에서 허우적댔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소들도 지붕 위에서 오도 가도 못 하는 신세였다. 지켜보던 주민들은 가족 같은 소를 잃을까 봐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크레인과 마취총까지 동원해 대대적인 구출작전이 펼쳐졌다.

김 씨는 부모와 함께 소 270마리를 키웠다. 폭우로 절반이 넘는 170마리가 폐사되거나 비에 떠내려갔다. 살아남은 100마리도 헤엄치다가 상처를 입거나 물을 마셔 지금까지도 시름시름 앓고 있다.

구조된 다음 날 쌍둥이 송아지를 낳아 화제가 됐던 어미 소도 건강이 악화됐다. 젖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쌍둥이 송아지마저 상태가 좋지 않다. 근근이 분유를 먹이고는 있지만 김 씨는 ‘행여나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김 씨 말고 마을 사람들도 마음이 무겁기는 매한가지다. 원래 양정마을은 구례 최대 소 사육단지였다. 섬진강 범람 직전까지 43개 농가에서 소 1508마리를 키웠다. 하지만 폭우로 461마리가 폐사하고 99마리가 유실됐다. 일부 소는 남해 무인도까지 떠내려갔다가 구조되기도 했다. 김 씨는 “농민들이 억장이 무너진 상황이라 말을 걸기도 쉽지 않다”며 “애지중지 키운 소 한 마리만 죽어도 눈물을 흘리는데 이렇게 많은 소가 죽었으니 마음이 무너질 것”이라며 울먹였다.

지금도 자고 일어나면 밤새 5∼10마리의 소가 죽어나간다. 파상풍, 폐렴 등 후유증 때문이다. 전용주 이장(56)은 “살아남은 소들도 계속 죽고 있다. 정부가 폐사한 소 보상을 20년 전 가격으로 해준다는 말이 있어 더 막막하다”고 하소연했다.

마을 수의사 정기영 씨(68)도 하루하루를 힘들게 버티고 있다. 구례읍에서 38년간 가축병원을 하며 주민들과는 가족처럼 허물없이 지낸다. 주민들에게 자식이나 다름없는 소가 아프다는데 그냥 두고 가기가 안쓰러워 복구가 시작된 10일부터 매일 마을에서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탈진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정 씨는 “양정마을 전체가 깊은 시름에 잠겼다”며 “주민들의 아픔을 생각하면 ‘봉사활동 하러 왔다’ ‘무료 진료 한다’는 말조차 하기 부끄럽다”고 낙담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전남#폭우 피해#소 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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