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워라밸]“무조건 퇴근하라” 한창 일할 시간에 사장이 사무실 급습한 이유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3월 21일 19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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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신세계그룹 이마트 인사팀은 머리를 싸맸다. 회사 전체로 업무 시간은 긴데 생산성은 떨어지고, 조직은 정체됐다는 진단이 나왔다. 해법을 마련해야 했다.

크게 두 가지를 바꿔야 한다는 결론이 났다. 일하는 시스템과 문화다. 올 초 주35시간 근무제를 도입하기 전까지 2년 동안 시스템과 문화를 함께 바꾸기 위해 애썼다. 특히 문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배광수 이마트 인사팀장은 “PC오프, 집중근무시간제, 회의 시간제한 등 각종 제도를 도입했다. 제도의 성공을 위해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임원 평가였다. 부서별 야근자를 조사하고, 야근자가 많으면 상위점수는 못 받는 식으로 했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임원들이 야근 없이 성과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인식하게 해야 한다. 이는 결국 최고 경영진의 의지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요즘 기업들은 근로시간 단축과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사회적 요구,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일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제도를 실험 중이다. 하지만 제도가 처음 도입되면 직원들의 반응은 대체로 이렇다. “설마, 진짜로 저걸 해도 될까?”

자율근무제를 도입한 기업 관계자는 “어제 12시간 일하고 오늘은 3시간만 일하기로 했어도 다들 눈치를 보며 또 오래 앉아 있다. 이들에게 최고 경영진의 의지가 확실하며 중간 관리자도 이를 인식하고 있다는 확신을 줘야 문화로 정착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리더의 의지가 중요하다

2016년 어느 수요일 오후 5시 30분. 모 대기업 직원들이 술렁였다. 사장이 사무실 순찰을 돈다는 극비 정보가 돌았기 때문이다. 사장은 왜 한창 일할 시간에 사무실을 급습한 걸까?

A기업은 매주 수요일 ‘가정의 날’을 도입하면서 오후 5시 30에 무조건 퇴근하도록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다들 눈치를 봤다. ‘휴가 가란다고 진짜 가고, 할 말 하란다고 진짜 했다간 집에 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이 주저주저하자 사장은 영업본부를 뛰어 다니며 사무실에 남아있는 직원들을 회사 밖으로 쫓아냈다. 그래도 야근하는 사람이 두 번 이상 걸리면 해당 팀장의 결재권을 박탈해버렸다.

사장은 퇴근 후 집에서 근무하는 사태를 막으려 사내망 접속 상황을 전수 조사하는 꼼꼼함도 보였다. 몇 달이 지나자 사장이 ‘뜨지’ 않아도 알아서 집에 가는 게 문화가 됐다. 한 과장은 “학교도 아니고 사장이 돌아다니며 직원들을 퇴근 시키는 게 처음에는 웃기기도 했는데 그래야 팀장이 바뀌고 직원들도 바뀌고 문화가 되더라”라고 전했다.

티 카페 오가다의 최승윤 대표는 책상 앞에 종이 있다. 종의 용도는 퇴근시간을 알려주는 것이다. 최 대표는 종을 시끄럽게 마구 치며 퇴근을 독려 한다. 최 대표는 월요일 오후 출근 제도도 도입했다. 이른바 ‘월요병’ 이라고 불리는 업무 비효율을 막으려고 월요인은 아예 오후에 출근을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최 대표는 “직원들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제도”라고 말했다.

관리자의 ‘센스있는 한 마디’도 워라밸 정착에 도움이 된다. 육아 문제로 아침 늦게 출근하고 있는 김하나 씨(32·운송회사 대리)는 “팀원들에게 미안하기도 해서 조금 일찍 출근했더니 부장이 ‘왜 일찍 왔냐. 밥 못 먹었을테니 뭐라도 먹고 오라’고 해서 너무 고마웠다”고 말했다. ‘눈치 보지 말고 당당히 퇴근해’, ‘일이 바빠도 집안일 먼저 챙겨라’는 말이 리더에게서 듣고 싶다는 의견도 있었다.

모든 조치를 취했는데도 변하기 어렵다면 조직개편, 인력 재배치, 추가 고용 등 근본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이 또한 경영진의 의지 없이는 불가능하다.

●정착 때까지 강제 조치도 필요

외국계 자동차회사 인사팀은 대표에게 ‘금요일 오후 1시 퇴근제’를 제안했다. 계열 회사에서 이 제도를 시행했더니 반응이 좋다고 보고했다. 해외 본사 출신인 대표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우리 자율 근무제인데 다들 원했다면 왜 그동안 퇴근을 안했나요?”

인사팀은 “한국 문화에서는 아무리 자율 근무제여도 오후 1시 퇴근은 눈치를 보게 된다. 아예 제도를 선포해 달라”고 했다.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문화적 배경 속에서 기업 문화를 바꾸려면 강제 조치나 반복 캠페인도 도움이 된다는 게 기업들의 설명이다. 2014년 두산그룹은 ‘왜(WHY)’캠페인을 진행했다. ‘상사가 한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다시 묻자’는 소통 캠페인이다. 예를 들어 부장이 “절대 강요하는 것은 아닌데,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아 술 마시자”라고 했을 때, 오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모를 땐 “진짜 가도 되는 것인가”라고 다시 묻자는 취지다.

두산 경영진은 구체적이지 못한 업무 지시와 직장 상사의 말을 눈치껏 알아듣고 해석해야 하는 문화 때문에 업무 효율이 떨어진다는 판단을 하고 이 캠페인을 도입했다. 두산 관계자는 “3년 동안 줄기차게 캠페인 영상을 보고 들으니 이제 ‘다시 묻는 문화’가 정착되는 추세다”라고 말했다.

워라밸 문화가 사회 전체에 정착돼야 기업이 바뀐다는 주장도 나온다. 근로시간 단축에 대비해 올해 주 40시간을 도입한 어느 기업의 고민거리는 영업, 홍보, 대관팀이다. 회사 관계자는 “오후 5시에 퇴근했지만 거래처와의 약속이 7시다. 두 시간 동안 밖에서 서성이다 저녁 약속에 가는 상황이 많아 고민”이라고 말했다.

변종국 기자bjk@donga.com
김현수 기자kimh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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