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시민들, 이불 펼쳐 환자 대피 도와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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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 빛난 시민정신
보호자들 사다리차 붙잡아주고 다른 환자 먼저 피신시킨 10대도

한 사람의 손길이라도 더 필요한 순간이었다. 검은 연기는 병원을 휘감고, 안에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26일 오전 화마에 휩싸인 경남 밀양시 세종병원 앞에는 애가 탄 보호자들과 시민들이 모였다. 이들은 환자들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업거나 부축했다.

불이 막 번지기 시작한 이날 오전 8시경 병원 앞에 있던 시민 20여 명은 뒤도 보지 않고 구조에 나섰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귀가하던 우영민 씨(26)는 “사람들이 병원 창문으로 살려달라고 손을 흔들었다. 다른 시민들과 함께 이불을 펴서 뛰어내리는 사람들을 받았다”고 말했다.

보호자와 가족도 뛰어들었다. 간호조무사 김모 씨(37)의 남편 김모 씨(37)는 “불이 났다”는 아내의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수라장이 된 응급실 앞에서 정신을 잃은 환자들을 직접 구급차까지 옮겼다. 어머니가 2층에 입원해 있던 손모 씨(49)는 사다리차와 소방슬라이드(미끄럼틀형 구조기구)가 흔들리지 않게 밑에서 잡고 받쳤다. 더 이상 구할 사람이 없다는 소방관 말을 듣고는 기구가 얼지 않도록 옆으로 치워뒀다. 그러나 이들의 아내와 어머니는 모두 숨졌다.

생사를 가르는 상황에서 남을 배려한 환자도 있었다. 독감 때문에 23일 입원해 27일 퇴원을 앞둔 박평안 군(19). 201호 병실에서 밥을 먹다가 “불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는 뛰쳐나와 연기가 적은 205호로 들어갔다. 소방대 대피용 사다리가 눈에 띄었지만 박 군은 다른 환자 4명을 내려 보내고 마지막으로 탈출했다. 박 군은 “붕대를 한 다른 환자가 보여서 순간적으로 결정했다. 당황스럽고 무서웠지만 본능적으로 양보한 것 같다”고 말했다.

밀양=최지선 aurinko@donga.com·사공성근 기자
#밀양#세종병원#화재#시민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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