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선정 올해의 인물]‘초인종 의인’ 故 안치범 씨

불길속 띵동… ‘나보다 남’ 깊은 울림

　

9월 9일 오전 4시경 서울 마포구 서교동 5층짜리 빌라 주민들은 미친 듯 울리는 초인종과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깊은 잠에서 깼다. 매캐한 냄새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확인한 주민들은 재빨리 대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동거녀의 이별 통보에 격분해 20대 남성이 저지른 방화는 이 ‘초인종 의인(義人)’이 아니었다면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앗아갈 뻔했다.

　빌라 4층에 살던 의인은 아래층에서 화재가 난 것을 감지하자마자 119에 신고를 하고 본능적으로 건물 밖으로 탈출했다. 하지만 그는 곧 연기가 자욱한 건물로 다시 뛰어들어 갔다. 잠든 이웃을 깨우기 위해서였다. 뜨거운 불길을 헤치고 층층마다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을 누르며 주민들을 깨워 대피시켰다. 폐쇄회로(CC)TV 확인 결과 그는 불길이 치솟는 건물 안을 들어갔다 나오길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 덕분에 빌라에 사는 이웃 20가구 주민들은 모두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정작 의인 자신은 불길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옥상 문 앞에 쓰러진 채 발견된 그는 유독가스에 질식해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이후 열흘간 사경을 헤매다 9월 20일 끝내 세상을 떠났다. ‘나보다 남’을 외치며 불길 속에 뛰어든 고 안치범 씨(28·사진)는 이기주의가 만연한 오늘날의 대한민국에 경종을 울린 참된 영웅이었다. 동아일보는 안 씨를 201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안 씨의 용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생전의 안 씨를 알지 못했던 많은 시민이 빈소를 찾아 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 이웃집 20곳 깨우고 스러져… 이기심에 경종

　시민들은 “타인에 대한 배려가 사라져가는 오늘날 안 씨는 남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우쳐줬다”고 입을 모았다.

　10월 31일 안 씨는 의사자(義死者)로 지정됐다. 그의 덕에 살아남은 이웃들의 증언은 의사자 인정에 큰 도움이 됐다. 안 씨는 같은 달 마포구로부터 ‘용감한 구민상’을, 지난달 7일엔 ‘서울시 안전상’을 수상했다. 한국성우협회도 생전에 성우를 꿈꿨던 안 씨를 명예회원으로 인증하는 패를 이달 16일 유족에게 전달했다. 협회 측은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며 안 씨의 죽음을 애도했다.

　안 씨의 가족은 18일 경기 안성시 유토피아추모관을 찾았다. 추모관에 있는 ‘안치범 가족나무’ 앞에 그동안 받은 상패들을 내려놓고, 빨간 글씨로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적힌 장식물을 나무에 걸었다. 안 씨의 아버지 안광명 씨(62)는 28일 동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치범이가 정말 기뻐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들에게 안 씨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누나 안젤라 씨는 동생 이름으로 매일같이 기사를 검색한다. 안젤라 씨의 페이스북엔 동생이 나왔던 기사 링크들이 한가득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사들을 볼 때마다 아들이 더욱 그리워져 가슴이 미어진다. 아들이 떠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보고만 싶다는 부모는 “그래도 사람들이 치범이에게 ‘훌륭한 일을 했다’며 칭찬해주니 보람되다”고 말했다.

　안 씨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2016년 연말 인사를 이렇게 전했다. “치범아, 한 몸 가는데 장한 일 했다. 많은 사람이 널 잊지 않고 있어. 이제는 다 내려놓고, 마음 편하게 잘 살아라. 조금만 기다리면 나도 곧 너를 만나러 갈 테니.”

최지연 기자 lim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