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만 김용순 김상득 김타관 박소수… 뒤늦게 망각서 깨어난 이름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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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탐사기획/프리미엄 리포트/日帝 강제동원 ‘잊혀진 恨’]
강제징용 1000여명 명단 확인
독신으로 사망해 피해신고 빠진듯… 창씨개명 감안땐 인원 더 늘어
日帝, 급여 제대로 지급 안해… 향후 피해배상 근거로 활용 가능

5일 국립사할린역사기록보존소에서 발견된 강제 동원 노동자 명부 중 나이호로 탄광 부분. 김타관 박소수 김산흥만 김전용순 등 한국 이름이나 창씨개명을 한 흔적의 이름들(점선)이 눈에 띈다. 이들은 강제 동원 피해 신고가 돼 있지 않아 명부를 통해 피해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 유즈노사할린스크=조종엽 기자
5일 국립사할린역사기록보존소에서 발견된 강제 동원 노동자 명부 중 나이호로 탄광 부분. 김타관 박소수 김산흥만 김전용순 등 한국 이름이나 창씨개명을 한 흔적의 이름들(점선)이 눈에 띈다. 이들은 강제 동원 피해 신고가 돼 있지 않아 명부를 통해 피해 사실이 처음 드러났다. 유즈노사할린스크=조종엽 기자
러시아 국립사할린역사기록보존소에서 5일 발견된 ‘근무원과 노동자 수 조사’ 문서(가칭 ‘마오카 명부’)는 영원히 잊혀질 뻔했던 강제 동원 조선인들의 이름을 담고 있다.

‘김타관(金他官)’ ‘박소수(朴小守)….’ 나이호로(內幌) 탄광(현 고르노자보츠크 소재) 부분에 등장하는 이들을 비롯해 마오카 명부에서 새로 확인된 피해자가 적지 않다. 이들에 대한 피해 신고가 되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할린에서 비교적 일찍 독신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 강제 동원 피해를 신고할 만한 가족이 없었을 경우도 추정할 수 있다.

마오카 명부가 모습을 드러낸 5일 역사기록보존소 열람실은 정적 속에 긴장감이 흘렀다. 명부를 찾아낸 방일권 한국외국어대 연구교수는 방문 전부터 보존소 측과 접촉하며 조사를 계속해 왔다. 명부를 펼치자 줄줄이 이어지는 조선인의 이름을 보면서 방 교수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나왔다.

향후 명부 전체를 분석해야 하지만 조선인의 비율은 10∼20%일 것으로 예상된다. 나이호로 탄광 부분에는 약 1684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방 교수가 이 중 12쪽에 실린 268명의 이름을 분석한 결과 45명(16.8%)가량이 조선인인 것으로 분석됐다. 창씨개명 당해 일본식 이름으로 기록된 이들도 적지 않아 조선인은 더 많을 가능성도 있다.

마오카 명부에서는 현 홀름스크, 네벨스크, 고르노자보츠크 등의 탄광과 공장 등 사업장 100여 개의 목록이 확인됐다. 오지(王子)제지, 가라후토(樺太)조선주식회사, 다이에이(大榮)광업소, 오하시구미(大橋組)를 비롯해 조선인을 동원해 석탄을 캔 탄광이나 군수 물자를 생산하거나 토목 건설을 한 회사 등이 대부분이다. 추후 연구를 통해 일제가 조선인들의 노동력을 어느 분야까지 투입했는지도 분석 가능할 것으로 기대된다.

마오카 명부의 정확성은 기존 자료로도 뒷받침된다. 사할린으로 강제 동원된 경남 고성 출신의 김원재 씨는 1966년 3월 “귀국을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일본에서 귀환 운동을 벌이던 박노학 씨에게 보냈다. 발신인 주소는 ‘나이호로 탄광, 고르노자보츠크 톨스토이 25번지’. 그의 이름은 마오카 명부 속 나이호로 탄광 부분에 그대로 등장한다.

‘김상득(金相得), 월수액(월급) 75엔, 상여 9엔, 일급(日給·일용직), 채탄부(採炭夫)….’

이 명부에서는 월급여가 함께 기록된 것도 특징적이다. 명부는 이름과 함께 노동자별로 월급여와 상여, 종별(월급·일급 등), 직종(채탄부·굴진부 등)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급을 받는 일용직이 대부분으로 보인다. 방 교수는 “향후 강제 동원 피해 배상 및 미불 임금 소송에도 주요한 근거로 활용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급여액을 통해 근무 햇수도 추후 분석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일제는 급여의 상당액을 강제로 저축시키거나 공채를 사도록 하는 방식으로 급여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 또 일제 패망 뒤 혼란으로 미불된 임금도 상당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당시 남사할린에 억류된 한인은 강제 동원된 당사자와 가족을 포함해 2만3000명 이상으로 추정되지만 행적이 묘연한 이들이 상당수다. 마오카 명부를 기초로 징용으로 행방불명된 이들의 행적을 일부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례로 나이호로 탄광 명부에 등장하는 김성동(金成東) 씨는 ‘왜정 시 피징용자 명부’와 대조하면 1902년생으로 경남 밀양군 삼랑진면 미촌에 살다가 1941년 9월 19일 끌려간 뒤 생사불명으로 기록된 사람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사할린에는 당시 마오카 지청을 포함해 도요하라(豊原) 에스토루(惠須取) 시스카(敷香) 등 4개 지청이 있었다. 나머지 3개 지청에서도 동일한 문서가 작성됐을 것이 확실시된다. 이 문서를 모두 찾게 된다면 지금까지 등장한 기록 중 사할린에서 광복을 맞았으나 돌아올 수 없었던 조선인 근로자 전체 명부에 가장 근접한 것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사할린 주 산하 각 지자체의 기록보존소에도 강제 동원 피해자에 관한 상세 정보가 추가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조사 필요성이 크다.

그러나 기록 조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지난해와 올해 조사 예산이 편성되지 않은 탓이다. 대일항쟁기위원회와 외교부는 한국 측이 사할린 내 공개 기록을 열람할 수 있도록 2013년 러시아 정부를 설득했고, 러시아 정부도 민감한 부분이 없지 않음에도 인도적 차원에서 이를 받아들였다. 이 위원회는 2014년 1개월 반 동안 10명의 실무 인력을 파견해 현지에서 자료를 조사했고, 7000여 명의 명부를 작성하는 성과도 냈다. 방 교수의 이번 조사는 행정자치부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의 사할린 유해 봉환 예산 일부를 활용해 가능했지만 고작 보름이 안 되는 동안 혼자서만 할 수 있었다. 학술 조사 형식으로라도 조사를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유즈노사할린스크=조종엽 기자 jj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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