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양국에 1개씩 설치 추진… 현지 장소 이견으로 지지부진
한국, ‘서울정원’ 대안 협상 나서
독일 베를린 주재 한국대사관 경내의 고 손기정 선생 동상. 2006년 서양화가인 강형구 당시 손기정기념재단 이사장과 조각가 박철찬 씨가 손 선생의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 70주년을 기념해 만들었다. 오른쪽 가슴엔 태극기(실선)가 선명하게 새겨져있다. 주독 한국문화원 제공
1936년 8월 9일. 42.195km를 2시간29분19초2에 달린 24세의 한국인 청년은 숨을 헐떡이며 독일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에 맨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9만여 관중의 환호를 받으며 시상대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챔피언은 웃을 수 없었다. 가슴에 그려진 일장기 때문이었다. 80년이 지난 지금도 지구촌 사람들이 일본인으로 기억하는 ‘슬픈 챔피언’ 고 손기정 선생(1912∼2002) 얘기다.
손 선생은 당시 독일 현지에서 일장기가 달린 단복과 훈련복을 거의 입지 않았다. 그 옷을 입은 것은 경기할 때와 시상식 때뿐이었다. 그것으로 일제 통치에 ‘무언의 항거’를 했다. 이런 기개로 세계를 정복해 억눌렸던 한민족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전했다.
손 선생의 한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제패 80년이 지나서야 풀릴 것으로 보인다. 그가 태극기를 달고 뛰는 모습의 동상이 베를린 하늘 아래 세워질 예정이다. 8일 외교부와 손기정기념재단에 따르면 정부는 17일 동상 설치를 위해 베를린 시와 베를린올림픽박물관 관계자 등으로 구성된 독일 측 협상단과 3차 협상을 한다. 2010년과 2013년 이후 3년 만의 협상이다.
재단을 비롯한 한국 체육계는 그동안 손 선생을 기리기 위해 태극기가 그려진 동상을 베를린에 세우려고 했다. 베를린 올림픽 주 경기장 ‘승리자의 벽’에 기록된 손 선생의 국적은 여전히 일본.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독일 측이 역사를 바꿀 순 없다며 국적 변경을 거부함에 따라 손 선생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동상을 통해서라도 알리려는 시도다.
재단 등 한국 체육계는 2006년 우승 70주년을 맞아 250cm 높이의 동상 2개를 만들었다. 한국과 독일에 하나씩 세우기 위해서였다. 한국에서는 2007년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 설치했지만 베를린에서는 협상이 잘 되지 않았다. 2010년 현지로 보내진 뒤에도 장소를 찾지 못해 주독일 한국대사관 한쪽에 놓여 있었다. 장소에 대한 의견 차가 컸다. 재단은 의미를 살리기 위해 베를린 올림픽 주경기장에 설치하자고 요구했지만 독일 측은 경기장이 문화재여서 손을 대기 어렵고 다른 종목 우승자와의 형평성을 들어 박물관 실내 설치를 제시했다. 독일 측이 제시한 실내 장소는 철제 기둥으로 둘러싸인 좋지 않은 자리라 거부했다.
하지만 재단은 6월 외교부에 베를린 시내 마르잔 지역에 있는 서울정원을 제3의 장소로 제시했다. 손 선생이 한국인임을 보여줄 수만 있다면 장소에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다. 손 선생의 외손자인 이준승 손기정기념재단 사무총장은 “할아버지가 일장기를 달고 뛸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이었다는 걸 더 늦기 전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빨리 동상이 설치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 측 협상 대표인 권세훈 독일 주재 한국문화원장은 “야외에 세울 경우 상시 관리가 어려워 낙서 등 훼손 위험도 있으므로 안전한 곳에 설치되는 걸 중요하게 여기겠다. 독일 측 관계자들과 한꺼번에 만나는 만큼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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