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상복의 여자의 속마음]<113>놀랍고 신기한 그녀의 기억력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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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놀라운 기억력은 사랑하는 여자의 기억력이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모루아의 말처럼 여자들은 경황이 없어도 사람과 관련된 일은 기막히게 기억해낸다. 이를테면 친구나 친척의 생일 및 결혼기념일 등을 줄줄이 꿴다. 남자가 보기엔 신기에 가깝다.

덤벙대는 여성이어서 기름 채우는 걸 잊는 바람에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시동을 꺼뜨리는 일은 있을지언정, 가까운 이의 특별한 날을 깜빡하는 경우는 드물다.

노르웨이대 연구팀이 약 4만8000명을 대상으로 분석해 보니 실제로 모든 연령대의 여성이 남성에 비해 특별한 날과 기념일을 잘 기억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남자들은 중요한 사실만을 기억하려 하지만 여자들은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관심 안테나를 세워 정보를 수집한다. 호감을 주고받으며 좋은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부부싸움깨나 해본 남자들은 안다. 아내의 놀라운 기억력이 불편한 상황에선 얼마나 가공할 만한 무기로 변하는지. 말다툼이 시작됐다 하면 온갖 과거사가 쏟아진다. 싸움의 계기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고릿적 이야기까지 전부 살아나 집안을 가득 채운다.

남자 방식에서 중요한 건 ‘사실’이다. 그런데 사실 여부가 확실하지 않으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진땀만 흘리게 된다.

아내 입장에선 그런 남편 때문에 더욱 부아가 치민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발뺌을 하며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니 약이 올라 물고 늘어진다. 남편에게는 쉽게 망각되는 사소한 발단이, 아내에겐 ‘기분 나쁨’ 딱지가 붙는 한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다. 딱지가 붙은 기억은 그녀의 ‘감정창고’에 별도로 저장된다. 언젠가 또 부부싸움이 벌어지면 자극을 받은 감정창고가 마치 인터넷 검색 결과처럼 과거의 일들을 우르르 쏟아낼 것이다.

누군가를 살뜰하게 챙겨주는 마음의 밑바닥에는 ‘신경 써준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똬리를 틀고 있기 마련이다. 그런 마음이 때로는 돌려받을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내가 당신을 알아주었으니 당신 또한 그렇게 해줘야 한다는.

하지만 기대감이 높을수록 배신감의 골도 깊을 수밖에 없다. 이때 많은 여성이 치부책에 진심을 담은 ‘궁서체’로 새겨둔다. 기분 나쁜 일을 감정 뇌에 새기고 또 새기며 반추하기 때문에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신비로운 치부책은 할 일이 없거나 한가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들 특유의 세상살이 방식이다. 관심과 사랑을 받아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기에 가까운 사람들과의 친밀감 정도를 늘 점검하는 것이다.

‘기념일의 달’ 5월이 시작됐다. 아내의 기억창고를 좋은 것들로 채워 보자.

한상복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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