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풀린 이력서, 쪼그라든 미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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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뀌면 세상이 바뀝니다]
[3월의 주제는 ‘정직’]<44>부메랑이 된 스펙 뻥튀기



지난해 지방대 공대를 졸업한 김모 씨(27)는 요즘 친구들과의 연락조차 끊고 두문불출하고 있다. 입사를 위해 작성한 자기소개서에 허위사실을 기재했다가 다른 곳에 취업한 친구들에게까지 불똥이 튀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학점과 토익 점수에 해외 어학연수나 회사인턴 경험도 없었던 김 씨는 번번이 취업에 고배를 마시자 어느 날 간 큰 결심을 하게 됐다. 평범한 스펙을 범상치 않게 허위로 작성하기로 한 것이다.

마침 한 인터넷 취업 카페에서 회원들과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공유하고 첨삭을 받던 과정에서 대부분의 취업준비생(취준생)들이 스펙을 부풀린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결심을 부추긴 동기였다. 방학 한 달간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왔다는 한 회원은 여행 기간을 해외 봉사활동 기간으로 둔갑시켰다. 지원한 회사에서 이탈리아 시골에 있는 봉사단체까지 확인할 리도 없고, 그럴 방법도 없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이 회원은 글재주가 있는지 봉사활동 내용은 물론이고 거기서 만난 사람들과의 우정, 젊은이들의 고뇌, 희망까지 자기소개서에 그럴듯하게 각색해 작성하는 놀라운 재주도 보여줬다.

김 씨는 마침내 재학 중 두 군데 게임 프로그램 공모전에 입상했던 사실을 부풀려 자기소개서를 작성했다. 실제 이 공모전 준비는 친구들이 다 했고 김 씨는 한 번 검토 정도만 한 것 외에는 한 일이 없었다. 친구들의 배려로 소위 이름만 올린 것이다. 하지만 재작성된 자기소개서에서 김 씨는 팀의 리더였고, 자신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한 것으로 둔갑했다. 서류 검증이 까다로운 대기업은 피하고 중소 게임회사에 서류를 낸 결과 김 씨는 합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쁨은 잠시. 너무나 탁월한 자기소개서 덕에 입사한 지 두 달 만에 한 프로젝트의 소팀장이 됐지만 아는 것이 없어 회사 동료들로부터 추궁을 당했다. 결국 이 사실이 회사에까지 알려졌고 김 씨는 허위서류 작성으로 퇴사당했다. 또 비슷한 시기에 다른 게임업체에 취업했던 친구들도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회사로부터 허위서류 작성 의혹을 받고 사실 여부를 추궁받았다.

실제로 김 씨처럼 이력서, 자기소개서 스펙을 부풀리는 일은 이미 ‘취준생’ 사이에서 ‘당연한’ 일이 됐다.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지난달 구직자 386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절반이 넘는 53.1%가 “스펙 뻥튀기를 알고 있다”고 답했고, 31.1%는 “실제로 스펙을 부풀려 본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가장 많이 부풀린 항목으로 ‘성장과정’(27.3%)이 꼽혔다. 회사 입장에서 확인이나 검증이 거의 불가능한 항목이기 때문이다. 스펙 부풀리기가 필요하냐는 질문에는 응답자의 44.6%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김 씨는 “들킬 거라 생각도 못했는데 결국 나는 물론이고 친구들에게까지 큰 피해를 줘 미안할 뿐”이라며 “모두가 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에 스펙을 부풀리다 보니 모두가 점점 더 힘든 길로 빠져드는 것 아닌가 싶다”고 후회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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