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전 입찰 전산시스템 10년간 구멍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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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檢, 2700억원대 입찰비리 적발]
전산조작 프로그램 직접 개발… 133건 불법낙찰, 134억 뒷돈받아
위탁업체 직원 등 6명 구속기소

7일 낮 경기 용인시의 한 아파트에 검찰 수사관들이 들이닥쳤다. 이 아파트는 한국전력 자회사로 전산관리 업무를 하는 한전KDN의 위탁업체 H사 전직 직원 정모 씨(35·구속 기소)의 집이었다. 수사관들은 안방에 놓여 있던 검은색 철제 금고를 발견했다. 정 씨의 지문으로만 열리는 생체 인식형 금고를 어렵게 열자 안에는 5만 원권 8330장(현금 4억1650만 원)이 들어 있었다. 50돈가량의 황금호랑이와 은괴도 총 5개가 놓여 있었다. 엄청난 현금을 쌓아 놓고도 그는 늘 출시된 지 10년 넘은 쏘나타를 타고 다녔다. 같은 시각, 정 씨의 동료였던 H사 전직 직원 이모 씨(39·구속 기소)의 사무실에서는 5만 원권과 지폐 다발을 묶을 때 쓰는 띠지 200여 개가 쏟아져 나왔다. 띠지로 추정한 액수는 10억 원이었다.

16일 검찰이 발표한 한전 공사 입찰을 둘러싼 비리 행태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들과 결탁한 전기업체 사장은 직접 공사를 수주하거나 ‘브로커’ 역할을 하면서 수십억 원을 챙겨 돈을 감추기 위해 오피스텔 수십 채를 구입하기도 했다. 전산 조작이 가능한 일자리는 ‘대물림’까지 해 가며 돈을 챙겼다.

이들의 전산 조작을 통한 입찰 비리는 2005년 1월 박모 씨(40·구속 기소)가 한전KDN의 위탁업체인 H사에 파견 직원으로 입사하면서 시작됐다. 박 씨는 한전의 공사 발주 시스템에 허점이 많다는 걸 알고 직접 전산 조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같은 해 전기업체를 운영하던 주모 씨(40·구속 기소)에게 범행을 제안했다. 두 사람은 전산 조작을 통해 5736 대 1의 경쟁을 뚫고 배전 공사를 따냈다. 박 씨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자신의 자리에 정보기술(IT) 업계 후배 이 씨를 소개했고, 순차적으로 정 씨, 강모 씨가 이 자리를 물려받았다.

이렇게 해서 박 씨 등 H사 전직 직원 4명이 10년간 챙긴 뇌물 액수는 검찰이 밝혀낸 것만 84억 원. 이들은 추적을 피하기 위해 돈을 모두 현찰로만 받았다. 또 이들의 전산 조작으로 공사를 직접 낙찰받거나 다른 업체에 낙찰받게 해주고 돈을 받은 주 씨도 50억 원가량을 챙겼다. 주 씨는 이 돈으로 광주 서구의 한 오피스텔 35채를 구입했다. 남은 돈으로는 수억 원대 외제 승용차 2대를 몰고 다니며 호화 생활을 즐겼다. 검찰이 확인한 이들의 입찰 비리는 전국 83개 업체가 수주한 공사 133건에 공사 계약액만 2709억 원에 달했다.

광주지검 특수부(부장 김종범)는 박 씨 등 H사 전 직원 4명과 주 씨 등 업자 2명을 16일 구속 기소했다. 앞서 지난달에는 전기공사 수주 편의를 제공하고 수억 원대 뇌물을 주고받은 혐의로 김모 씨(47) 등 전기업체 관계자 4명과 한모 씨(56) 등 한전 직원 5명을 구속 기소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김 씨 등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난 것보다 훨씬 많은 공사를 따내 50여 개 업체에 리베이트를 받고 공사를 넘긴 정황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 업체 대표는 “17년간 엄청난 투자를 해 회사를 여러 개 사들였지만 공사를 하나도 낙찰받지 못해 전 재산을 날렸다”며 “계약 금액이 2709억 원이면 실제 공사 금액은 1조 원을 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또 다른 입찰 비리 정황을 포착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한전#입찰#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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