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엄 리포트]PTSS 소방관 7명 인터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월 5일 19시 58분


코멘트
<소방관>

●박모 소방교(33)

-충북 ○○소방서 근무
-2010년 12월 30일 오후 화재 진압 과정에서 동료 2명과 함께 고립. 다른 2명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으나 산소가 없어 4층에서 뛰어내려 97일 동안 입원 치료.
-사건 당일 상황이 계속 이어지는 꿈을 반복적으로 꾸고 멍하게 있다 갑자기 소리치는 일 등을 경험.
-2013년 12월 16일 오전 충북 ○○소방서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그 날' 이야기를 듣고 싶다.

"2010년 12월 30일 오후 8시였어요.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 합니다. 그 날은 야간 근무를 하는 날이었어요. 5시 반에 서에 도착해 제복으로 갈아입고 장비점검하고 아주 일상적이었어요. 그러다 오후 7시 반경에 '화재가 났다'는 신고를 받았습니다. 빌라였는데 원룸 형식으로 돼 있는 곳이었어요. 거기에서 화재가 난 것이죠.

도착했을 때 거기 골목길에 다 차들이 주차돼 있어서 작은 차량만 진입하고 나머지는 걸어가야 했어요. 한 150m를 걸어 들어갔습니다. 어두웠었는데 오르막길이라 '헉헉'대며 올라갔던 기억밖에 없네요. 현장에 당도하자 건물 1층에서 창문 밖으로 화염이 솟구치고 있었어요. 선착대가 관창을 하고 화재를 진압하고 있었는데 진압이 쉽지 않은 상태였어요. 건물을 한 바퀴 도는데 4층에서 '구해달라'면서 사람이 손을 내밀고 있었어요. 말이 어눌해서 초등학생으로 알았죠. 아이인 줄 알고 그때부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어요. 보통 아무리 순간이라지만 마음을 다잡고 구조도 상상해가며 들어가는데…. 빨리 구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을 구하러 나를 포함한 구조대원 3명이 들어갔어요. 계단을 통해 10초 만에 꼭대기 층으로 올라갔습니다. 밑에서 진압을 하고 있으니까 금방 진압이 될 줄 알았죠. 4층은 아직 불이 번지진 않았고 연기만 자욱했어요. 건물 자체에 열기가 있어서 '사우나' 같은 느낌이었어요. 복도에는 5개 방이 있었어요. 근데 막상 들어와 보니 밖에서 볼 때랑 구조가 다른 거예요. 게다가 5개 방 모두 방문이 잠겨 있었고. 파손기로 철문 자물쇠 부분을 부수고 빠루로 제쳐서 여는데 철문이 다른 문처럼 부드럽게 열리는 게 아니라서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문 마다 한 5분에서 10분 걸리는데 하필이면 제일 마지막 집이었어요."

―이후 어떻게 됐나.

"화재는 진압되지 못했어요. 저흰 손으로 더듬더듬하고 지그재그로 걸음을 옮기며 구조할 사람을 찾았어요. 연기 때문에 앞도 안 보이는 상태였고. 종이 타는 것과 다르게 연기의 농도는 짙고 어두웠어요. 석유 재질 같은 것이 타면 연기가 원래 더 시커멓거든요. '놓쳤나'하는 생각에 초조했어요. 마지막 집 화장실에서 발견했습니다. 2~3평 도 안 되는 공간이라 문을 여는데 뭔가 걸리는 느낌이 들어서 '아 여기 있구나' 하는 것을 직감했어요. 문을 억지로 밀어 열었는데 놀랐어요. 180㎝도 넘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누워 있었거든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손으로 더듬더듬하며 만지는데 꽤 오래 걸렸어요. 이미 죽어있었죠. 중국인 유학생이었어요.

남성을 발견했을 무렵 '현장에서 빠져 나와라'라는 무전이 나왔었어요. 근데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서 '데리고 가자'고 이야기했어요. 제가 목덜미를 잡았고 나머지 두 명이 허리춤과 발목을 잡았어요. 목덜미를 잡은 제가 뒷걸음질치며 화장실에서 현관 쪽으로 걸어 나오는데 그 때 순간 멈칫했습니다. 등 쪽이 너무 뜨거웠어요. 뒤돌아보니까 '불바다'였어요. 계단도 집어 삼킨 상태였습니다. 고립된 거죠."
―그때 심정이 어땠나.
"무서웠어요. 아무런 생각도 안 났다. '아 잘못하면 죽겠다', '힘들어 죽겠다' 이런 개념이 아니었어요. 그냥 '여기서 죽는구나' 싶었죠. 게다가 제가 문 개방을 담당해 산소 사용량이 커서 산소도 바닥난 상태였어요. 창 밖으로 간신히 움직여서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마스크를 벗고 한 모금 마셨는데 창 밖으로 화염과 연기가 나오다보니 유독가스만 들어왔어요. 정신이 혼미해졌죠. 마스크를 다시 썼는데 산소는 바닥이 나서 '아 더 이상은 힘들겠구나' 싶었어요. 창 밖으로 뛰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창문을 깨고 보니까 옆 건물 1층 앞에 녹색 아크릴판이 있었어요. 한 2m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저기로 뛰면 죽진 않겠다 싶었어요.

창틀을 잡고 뛰려는 순간 바닥으로 꼬꾸라졌어요. 열에 의해 양손에 잡고 있던 창틀이 녹아 떨어져 버린 거예요. 뛰지 못하고 머리 쪽으로 떨어졌습니다. 이후 의식을 잃었어요. 이후 병원 이송 도중 깼어요. 너무 아파서 깬 거예요. 오른쪽 정강이뼈가 밖으로 튀어 나왔는데 차가 덜컹거리니까 통증으로 온 겁니다. 수술 후에 97일을 입원했습니다. 1년 반 휴식을 했고. 무릎, 정강이 뼈, 턱 관절, 치아 다 온전치 못했습니다. 인플란트만 11개를 했어요. 치아 28개 중에 25개가 부러졌고. 11개는 아예 탈구됐었죠."

―몸도 마음도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죠. 혀로 입 안을 만지면 치아는 없고 온 몸은 붕대로 감겨 있었어요. 한 6개월은 치료만 했어요. 그나마 몸이 안 좋을 땐 몸 생각만 났어요. 그런데 몸이 조금 나아지니까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 날 아침 출근하는 장면부터 떨어지는 장면까지 파노라마처럼 이어졌어요. 무서워서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멍하다 갑자기 소리치기도 했고요. 진통제에 취해 2시간 정도 잠을 자는 것이 유일한 휴식이었습니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런 일이 있다는 거 자체부터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요령 안 피우고 열심히 했는데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지 싶었어요. 악몽은 분명 꿈에서만 나타나야 하는데 눈 뜬 순간에도 온통 그 생각뿐이었어요.

그 생각에 거의 지배가 됐었다고 보면 됩니다. 하루 종일 20시간 이상을 그 장면만 생각했어요. 부인이 "상담 받아보면 안 되겠냐"란 말을 계속 했어요. 극심할 때는 1시간도 못 잤습니다. 눈 감으면 다시 눈을 못 뜰 거 같단 생각이 계속 들었거든요. 전구가 반짝이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어요. 큰 바위가 머리와 목 위를 짓누르는 듯한 중압감이 느껴졌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면서…. 반년을 그렇게 살았어요. 되돌아보면 그 순간을 반년 산 것 같습니다.

6개월 동안 그렇게 지내다 부인이 하루는 울먹이면서 "이러다 어떻게 될 것 같다. 제발 치료를 받자"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 이후부터 마음을 부여잡았습니다. '좋아지고 있잖아', '지난 일이잖아', '그만 생각하자' 이렇게 말을 해가면서 마음을 다잡았어요. 그렇게 버텼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잊혀지고…"

―그만 둘 생각도 했을 듯 한데.

"아픈 동안 그만둘까 하는 생각 많이 했어요. 결국 가장이니까 나중에 아이도 낳으면 부양해야 하니까 그만 못 뒀지만. 지금 이렇게 인터뷰하고 나면 그 순간이 떠올라 한 동안 힘들어요. 사라지는데 시간이 좀 걸립니다. 일이 바쁘면 또 생각 안 나고. 지금도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느낌이나 생각들이 있어요. 마치 마음속에 '어두운 상자' 하나가 생긴 듯 합니다. 열렸다 닫혔다 하네요. TV에서 순직자나 사망 관련 이야기들이 나오면 슬프고 먹먹해지고 그래요."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래도 소방관을 하고 싶나.

"27살로 다시 돌아간다면 이 일 안 할 것 같아요. 주변에도 추천 안 합니다. 다른 공무원도 많은데. 아주 건강하게 지내는 분도 계시지만 바람 잘 날 없는 직업 아닙니까. 너무 힘든 기간을 경험했고요."


●김모 소방장(44)


-인천○○소방서
-1997년 8월 단 하루 동안 아이 2명의 시신과 연료통에 빠져 숨진 40대 남성의 시신 수습.
-악몽, 불면증, 우울증 생김.
-2013년 12월 17일 오전 인천○○소방서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PTSD로 치료를 받은 걸로 안다.

"처음에 치료 받기 싫었어요. 왠지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 것 같았고. 기록이 남지 않는다고 소방방재청에서 얘기를 했는데 괜히 의심이 들고 그랬어요. 가기로 한 다음에도 갈지 말지 한참을 고민했죠. 결국 갔는데 정말 많이 도움이 됐어요. 800문항 정도 되는 설문 검진을 받고 5회 정도 치료를 받았어요. 검사 비용과 치료 비용은 방재청에서 지원해줬어요."

―어떤 것 때문에 PTSD가 생긴 건가.

"1997년 8월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래된 얘기이자 최근까지 이어지는 얘기죠. 아주 특별한 날이었어요. 인천제철 부지 공사현장에 출동을 나갔는데 지름 20m 깊이 3m 정도 되는 웅덩이에 빗물이 가득 차 있었어요. 거기 아이가 빠진 거예요. 휴대전화도 없던 시기였을 겁니다. 스티로폴을 타고 초등학교 남학생 2명이 놀다가 한 명이 빠진 거였어요. 살아나온 아이가 주변에 있는 아저씨한테 알려서 신고가 됐나 봅니다. 출동까지 40여 분이 걸렸고 아이는 이미 죽은 상태였어요. 어찌됐던 아이 사체는 꺼내야 했기에 바로 팬티만 입고 뛰어들었습니다. 잠수해서 어두운 흙탕물을 손으로 휘저으며 아이를 찾았어요. 그러다 돌 사이에 있는 애를 발견한 거죠."

―발견했을 때 느낌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애 손을 잡았어요. 그 순간의 촉감, 느낌이 지금까지 나를 쫓아다니는 겁니다. 팔뚝을 잡았는데 섬뜩했어요. 부들부들한 그 느낌. 아이 피부는 원래 좀 다르잖아요. 애가 밑에 있으니까 무거울 줄 알고 확 잡아 당겼어요. 근데 부력 때문인지 아이가 확 위로 올라가더라고요. 그게 제가 경험한 첫 사체였습니다. 아이를 꺼내서 담요로 덮고 CPR(심폐소생술)을 했어요. 병원까지 그렇게 옮겨갔습니다. 의사가 "사망한지 한참됐다"고 했어요. 꽤 찜찜했죠. 답답한 마음도 들고."

―그 날 다른 일들도 있었나.

"돌아와서 한 두 시간 지나고 또 다른 출동을 나갔습니다. 한 40대 남성 인부가 항선 연료통에 빠져서 사망한 사고였는데 항내에 있던 큰 배 안에서 일어난 사고였어요. 배 위로 올라가니까 사체는 이미 꺼내져 있었어요. 온 몸이 다 기름 범벅이었죠. 눈에도 얼굴에도 몸 전체에도…. 이미 기름이 목과 폐에 다 들어가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방금 전 기억이 있어서 그런지 좀 덜하긴 했지만 섬뜩하긴 마찬가지였어요.

'희한한 날이네' 싶었는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이날 밤 12시가 넘어서 신고가 들어왔는데 '아이가 숨을 안 쉰다'는 거였어요. 도원동의 한 15평 되는 빌라에서 신고가 들어왔어요. 엄마가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가 아이를 깔아뭉개 애가 질식사해버린 거예요. 신고를 받자마자 구급차를 타고 갔습니다. 빌라 2층에 올라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남편은 야간 근무라 집에 없었고 아주머니만 계셨어요. 침대에서 같이 자다 그랬다고. '돌이 안 된 아이'였습니다. 엄마는 옆에 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고 있었어요."

―아이 모습은 어땠나.

"침대에 누워 있는 갓난쟁이는 팔과 다리가 축 늘어져 있었어요. 안았는데 아무런 힘이 없이 늘어졌습니다. 그 촉감. 지금도 기억나는 그 촉감. 부들부들한 촉감.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살았으면 좋겠다는 그 생각들이 정말 저를 힘들게 했습니다. 구급차에서 제가 크리스찬이다 보니 기도를 해줬어요. 혹시나 이 아이가 살아나지 못하더라도 좋은 곳으로 인도해달라고요."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나.

"아직도 생각이 납니다. 당시엔 혼자 우울해했어요. PTSD개념도 없을 때였고요. 지금도 아이들 얘기만 하면 그 날이 떠오릅니다. 그땐 잠을 잘 못 잤어요. 선잠을 자면서 악몽을 꾸고 그랬죠. 그 아이를 살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저를 쫓아다녔습니다. 어디에 쫓기는 꿈을 계속 꿨어요. 아이는 다행히 나타나진 않았는데 물가가 나오는 꿈도 꿨었죠."

―PTSS판정은 언제 나온 건가.

"2013년 6월에 PTSS검사를 받고 위험군이라고 결과가 나와서 7월부터 5번 치료를 받았습니다. 지금은 결혼하고 14살, 15살 남자 아이들을 두고 있어요. 그런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애들이 어릴 때 정말 많이 챙겼어요. 위험한 거 사전에 피하게 하고요. 자전거 타도 꼭 보호대 다 하게 하고. 지금은 그 기억이 많이 없어졌어요. 그런데 뉴스 같은 데서 아이들 사고 이야기가 나오면 그 날이 떠오릅니다. 아이들이 다친 것을 봤다거나 할 때도요.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 많이 합니다. 찝찝하고 생각하면 또 아쉽고 그러니까요."

―당시 증상은 어땠는지.

"당시에는 괜히 짜증이 나거나 눈물나고 그랬어요. 무기력해지고요. 집사람한테 괜히 나무라기도 하고요.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 많이 흘렸습니다. 어디 얘기할 곳이 없으니까 힘들었어요. 본인 출동은 본인이 책임지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지금처럼 이런 프로그램이 있고 그럴 때가 아니었어요."

―뭐가 그렇게 힘들었나.

"못 살렸다는 게 굉장히 힘들었죠. 신고를 빨리 했더라면 하는 생각. 그 아이의 어머니가 옆에서 울고 있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 부들부들한 느낌. 기억 속의 아이는 지금도 내게 그 나이 그대로에요. 자라지 않는 아이인 거죠. 안고 구급차 가던 길도 생생하고. 아. 물 속에 있던 아이 꺼냈을 때도…. 내가 확 끌어 당겼는데…. 게다가 옆에 놀던 아이가 하는 얘기로는 죽은 애가 고모네 집에 얹혀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장면들이 계속 생각납니다. 당시에는 2교대라 휴가도 못 갈 때였어요. 휴직은 생각도 못했었습니다."

―치료는 어떻게 이뤄졌는가.

"제일 힘들었을 때랑 좋았을 때를 그림으로 그렸어요. 지금 상태를 사진으로 고르라고도 하고. 다양한 것을 했습니다. 제가 그래프를 그렸는데 와이프랑 연애 했을 때는 위편으로 그래프를 그리고 애기 났을 때도 위로 막대기 그래프를 그렸어요. 그 안 좋았던 기억은 아래로 길게 그래프로 그렸고요. 상담사가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고 그랬습니다."

―도움이 됐나.

"확실히 좋아지더라고요. 얘기할 수 없는 것까지 하다보니 후련했습니다. 확실히 필요하단 걸 느꼈어요. 안 맞는 부분도 있어서 좀 성격에 맞는 시설이 생기거나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어요. 안 받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것 같습니다. 소방은 그래도 조직 내에서 배려해주는 분위기입니다. 순직하는 직원도 계속 생기고 하다보니까요. 자기가 의지를 가지고 치료를 받느냐가 중요한데 분위기를 바꿔야 할 것 같아요. PTSS센터가 생겼으면 합니다. 사실 이런 부분은 전문가 찾기도 쉽지 않으니까요. 현재 7개월째 내근 중입니다. 안전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요."

―그만두고 싶진 않았는지.

"관두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어요. 자긍심으로 버틴 겁니다. 평생 못 잊을 일을 겪어서 고생했지만 언젠가 또 마주할 일이기도 하잖아요. 지금 돌이켜봐도 '참 특이한 날'이었어요."


●허모 소방장(44)


-서울 ○○수난구조대
-2013년 7월 15일 발생한 서울 노량진 수몰사고에서 물이 가득 찬 맨홀에 진입해 시신 수색.
-가위에 눌리는 꿈을 자주 꿈.
-2013년 12월 19일 오후 서울 한강공원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강가라 그런지 엄청 춥다.

"여기가 칼바람 부는 데입니다. 정말 춥고 체감온도가 10도 이상은 더 떨어져요. 예전에는 수경 쓰고 털모자 쓰고 그러고 다녔어요. 이전 배에는 보호막도 없어서 배타고 나가면 거의 얼굴에 마비가 올 정도였죠."

―주로 어떤 출동이 많나.

"투신자살이 가장 많아요. 40% 이상은 자살이라고 보면 됩니다. 올해는 기록까지 갱신했어요. 8월 한 달만 투신 관련 신고가 153건이나 들어왔어요. 물론 안전조치된 것도 있지만요. 생명의 전화를 들고 상담을 할 때도 출동은 합니다. 전화에 버튼이 2개가 있는데 하나가 119버튼이고 하나가 상담요원 버튼입니다. 우리한테 연결이 와서 상담한 적도 있고 그렇죠."

―익사체를 건지는 게 굉장히 힘들다고 들었다.

"여름에는 수온이 26도가 넘어가서 부패가 빠릅니다. 하루 이틀만에 떠올라요. 한 22도에서 25도 사이 일 땐 3일에서 5일이면 떠오르더라고요. 수온이 낮을 때는 한 달 넘게 걸리는 경우도 있어요. 얼마 전에 젊은 대학생이 밤에 술 먹고 놀다가 2명이 죽었는데 그런 사건이 발생하면 참 속상하고 그렇더라고요. 처음에는 근무하면서 사체나 죽음에 대한 것을 접하기 싫고 그랬는데 지금은 감각이 없어진다고 해야 하나. 더 무덤덤하고 무감각하고 그렇더라고요.

사체가 물 속이라 냄새가 안 날 것 같지만 꺼내면 정말 독합니다. 형태가 일단 불어있으니까 보기 정말 흉하고. 물 속에서 가까이 갔을 때 코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걸 보면 정말 끔찍해요. 떨어질 때 충격으로 나오는 겁니다. 몸, 얼굴이 물에 불어서 이목구비 형태 분간도 불가능한데 피를 흘리며 물 속에서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위험한 순간도 있었는지.

"노량진 수몰 사고 때 수난구조대 전체가 비상이었어요. 터널은 물로 가득 찼었고 맨홀 깊이가 48m였는데 43m 정도가 물에 잠겨 있었죠.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아예 안보였어요. 흙탕물이었고요. 그 날 야간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비상 걸려서 모두 노량진으로 이동했습니다. 물 쪽이니까 아무래도 우리가 전문가다보니. 스쿠버 장비랑 더블 탱크(산소통, 보통은 싱글 탱크를 쓴다고 함. 한 개는 40분 두 개는 80분유지)를 챙겨 갔어요. 위에서 20m~25m 정도 되면 들어가자고 했어요. 차량에서 대기를 했죠. 차 안에서 쉬는데 정말 스트레스 많이 받았습니다. 현장에 배수 직원, 기자들, 소방서 직원들, 유가족도 와 있고 한 200명 정도는 있었던 것 같아요. 유가족이 빨리 들어가라고 엄청 오열을 했어요. 구조대가 안 들어가면 민간단체라도 넣으라고 그랬어요. 근데 그 안에 엘리베이터 선이나 여러 가지 누전 문제도 있고 안이 안 보이기 때문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어요. 기본적으로 48m 깊이엔 규정상 들어갈 수도 없었고요."

―규정이란 게 어떤 건가. 들어가는데 깊이 제한이 있는 건지.

"43m 깊이면 질소마취 상태가 옵니다. 그게 깊은 곳에 들어가면 패닉 상태가 돼서 술에 취한 사람처럼 행동하게 됩니다. 마스크를 스스로 벗거나, 발버둥을 치거나 정신을 못차리게 되는 거예요. 매뉴얼에는 한계치가 30m 정도로 돼 있어요. 그리고 43m면 4.3기압인데 그 상태에서 잠수할 수 있는 시간은 5분도 채 안 됩니다. 이틀 째 오후 4시경 25m가 됐을 때 들어갔어요. 저랑 다른 직원이 같이 들어갔습니다.

외국은 보통 다이버들의 상태를 최상으로 유지하게 하는데(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렇게 안 됐어요. 버스에서 이틀을 있었고 잠을 한 숨도 못 잤습니다. 그 상태로 들어갔었고요. 정말 불안했어요. 그 안에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 전기가 통하진 않을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였거든요. 안의 구조를 모르니까 한강은 트여있는데 여긴 우물통으로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결국 들어간 걸로 아는데.

"맨홀 바닥에 도달해야 통로로 들어가는데 결국 바닥까지는 못 들어갔어요. 엘리베이터 케이블선을 잡고 내려갔었는데 선이 이미 느슨해져서 움직일 때마다 물에 나풀나풀 거렸어요. 밑으로 내려가는데 마치 몇 개의 관문을 통과하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때 공포나 두려움은 말로 설명 못해요. 정말 목숨을 걸고 내려가는 거니까. '어디 걸리면 어떻게 될까' 이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죠. 부딪혀가면서 내려갔어요. 수온은 23도 정도였는데 흙탕물이었어요. 아래로 내려가면서 칠흙 같은 어둠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다 한 20m를 내려갔는데 고립될 것 같은 느낌이 문득 들었어요. 장애물이 너무 많았고, 두려움이 엄습해온거죠. 어지럽고 정신이 혼미해졌어요. 이러다 패닉 상태가 올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요. 같이 내려온 동료를 잡았는데 의사소통이 안 됐어요. 바로 앞에 있지만 보이질 않으니까요. 목소리를 정말 힘껏 냈습니다. "상승해"라고요. 계속 소리를 질렀더니 그걸 들었는지 어떻게 올라오게 됐어요. 내려갔다 올라오는데 20분정도 걸렸는데 20년은 걸린 것 같네요."

―이후에 그때 기억으로 괴로웠나.

"'그때 패닉이 왔다면 어떻게 됐을까'란 생각이 문득문득 들어요. 정신이 혼미했고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순간 판단을 잘못했으면 진짜 위험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수몰현장은 정말 최악의 조건이었거든요.

한동안 잠을 못 잤어요. 출동 후에 집에 갔는데 그게 며칠 만에 간 거였거든요. 반갑고 그래야 되는데 애들한테 화를 내고 그랬어요. 몽롱하고 그때 생각이 계속 났었거든요. 맨홀을 보거나 유사한 사고가나면 그 때 그 공포나 장면이 떠오릅니다. 꿈도 많이 꿨어요. 특히 가위에 눌린 듯한 꿈을 많이 꿨어요. 꼭 군대에서 훈련 받는 꿈을 꿨어요. 깨고 나면 옷이 땀에 흠뻑 젖어있었고요. 생각해보면 PTSS 증상이었던 것 같아요."

―수영을 누구보다 잘 할 것 같은데 그래도 물이 두려운지.

누구보다 수영을 잘하지만 누구보다 물을 두려워합니다. 교육 체험도 많이 했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있거든요. 최악의 환경에서 보통 사고가 나는데 그 현장에 가야 하니까요. 구조대원이기 이전에 인간 아닙니까. 죽음에 대한 공포를 하루하루 안고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소방방재청에서 PTSD 설문을 주기적으로 한다고 들었는데.

설문으로 하는데 어떻게 거기에 다 표현하고 그러겠어요. 다 대충하고 그럴 겁니다. 정상이라고 나왔는데 건성으로 했던 것 같아요. 왠지 내가 환자 같고 그러기 싫어서요. 자꾸 내가 정상인이라고 자기 최면을 거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모 소방장(42)


-경기 ○○소방서
-상황실에서 근무하며 수시로 욕설이 난무하고 장난으로 걸려온 전화 등 응대.
-과호흡, 우울증, 성격변화 등 증세.
-2013년 12월 19일 오후 경기의 우 소방장 자택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주로 어떤 근무를 해왔나.

"화재 진압 쪽에 주로 있었고 상황실에서도 근무를 했어요. 상황실 근무하면서 전화 상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신고전화도 많고, 엉뚱한 장난 전화도 많았어요. "왜 빨리 안 오냐 이 새끼야"부터 시작해서 욕설이 난무했어요. 특히 이 곳은 관할하는 구역이 너무 넓어서 출동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도 했거든요. 그럴 땐 같은 건에 대해서 신고가 수십 통이 왔습니다."

―어떤 상황들이 있었나.

"2006년에 상황실에 근무를 했는데 별 상황이 다 있었어요. 전봇대 불 빛 보고 화재라고 신고하는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이 근데 빨리 오라는 신고였어요. 화재 경우엔 보는 사람마다 신고를 하니까 전화가 수십통이 왔고. 그때 3명이서 상황실 근무를 했는데 신고 받고 지령 내리고 정신없었습니다. 그때부터 강박증에 시달린 것 같아요. 성격이 원래 느긋했는데 급해지고 짜증이 늘었어요. 집에 오면 부인이 '왜 그리 까칠하냐'라고 할 정도로 예민해지고 우울증도 왔었죠. 그래서 병가를 내고 열흘을 입원했었습니다. 과호흡이 와서 어지러웠거든요. 더 일을 하기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신고 전화가 하루에 100통도 넘게 옵니다. 그땐 전화벨 소리만 들으면 답답하고 짜증나고 그랬어요. 재촉하고 그러면 전화하다 소리를 막 지르고 싶기도 했으니까요."

―병가 이후엔 어떻게 지냈는지.

"그 이후 센터에 복귀해서 화재 진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2012년 12월에 공장 주변에 야적장에 불이 나서 출동한 적이 있었어요. 100여 평 규모의 단층 공장이었고 그 앞에 쌓여있는 물건들에 불이 붙은 거였습니다. 야간 근무를 하다가 화재가 났다고 해서 현장에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것이었죠. 관창을 하고 불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꺼지는데 한 4~5시간 걸렸던 것 같아요. 마스크를 썼는데도 쾌쾌한 냄새가 났었어요. 눈도 매웠고 무엇보다 너무 뜨거웠어요. 방수복을 입고 있어도 뜨거워서 동료들하고 서로 물을 뿌려주고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사우나보다 몇 배는 뜨거웠어요."

―언제 힘들고 어떻게 대처하는지.

"TV에서 순직 이야기가 나오거나 그럴 땐 정말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현장에 갈 때마다 더 긴장하게 되고요. 2006년 상황실 근무하고 나서부터 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어요. 한동안 약을 안 먹을 때도 있었는데 가스를 실은 차가 폭발한 현장을 다녀온 후 불안한 증세가 나타나서 약을 다시 먹었어요. 더 예민해지고 매사에 짜증이 나고 그런 상태였거든요. 당시 LPG가스통을 실은 차가 폭발했는데 소리가 엄청 컸고 또 연쇄폭발이 이어질 수 있으니까 엄청 초조했었죠. 그 날 이후 며칠간 잠을 못 자고 불안해하고 그랬어요."

―PTSD 검사를 한 적 있는지.

"연 초에 PTSS검사했을 때 위험군으로 나왔어요. 현재는 대학병원에서 정신과 진료를 받으면서 우울증 약을 먹고 있어요. 의사가 얘기를 해도 업무상 특성을 잘 모르는 게 아쉽더라고요. 벽을 두고 얘기하는 느낌도 들었고. 차라리 와이프가 더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말 못하고 끙끙 앓았는데 이야기하고 나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고참에게라도 상담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정신과 진료는 안 좋게 생각하니까 이런 것에 대한 편견이 개선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모 소방사(28·여)


-서울 ○○소방서
-2012년 9월경 아파트 11층에서 투신해 숨진 장애인 시신 수습.
-한 동안 시신의 모습이 생각남.
-2013년 12월 19일 오후 서울 ○○소방서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일 하면서 무엇이 제일 힘든가.

"민원인들이 항의하는 거에 대응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처치는 배우는 거고 전문가니까 괜찮은데 '불친절하다'라고 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한참 어려움을 겪었죠. 이게 환자에 집중하다보면 보호자에게 소홀할 때도 있고 그렇거든요. 술에 만취한 사람이나 노숙인들 출동도 어려워요. 대부분이 이런 출동이 많은데 폭언이나 욕설을 듣는 경우가 많거든요. 여대원일 경우 더 함부로 대하는 것 같아요. 제가 "어디 아프세요"라고 하면 눈빛부터 달라져요. 한 교통사고 환자는 술에 만취한 사람이었는데 "자꾸 쳐다보면 눈알을 뽑아버리겠다"라고 했어요. 구급차가 워낙 좁은데 대원 2명, 환자 1명 타면 꽉 찹니다. 그 밀폐된 공간에서 그런 이야길 들으면 정말 무서워요."

―투신 현장 같은 곳도 많이 가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전에 있던 곳에서 투신 현장에 많이 갔어요. 고시생들이 육교에서 뛰어내린 경우가 꽤 있었거든요. 그러면 밑에 자동차가 치거나 밟고 지나가기 때문에 시체가 정말 온전치 못해요. 그런데 왠지 그런 건 오래 남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전 목을 맨 사체나 그런 게 오래가더라고요."

―그런 현장에 가면 잔상이 남을 것 같다.

"잠을 잘 못 자요. 비번 일 때도 잘 못 잡니다. 잡생각이 많이 드는 것 같아요. 누우면 일 하기 전에는 정말 금방 잠들었는데 요즘은 2시간은 걸리는 것 같아요. 그래도 식사는 잘 하는 편입니다."

―어떤 현장이 제일 힘들었나.

"2012년 9월 주간 근무를 하고 있었을 때였어요. 해가 뉘엿뉘엿 질 때였는데 아파트에서 누가 뛰어내렸다고 신고가 들어왔어요. 경비실에서 경찰에 먼저 신고를 했고 경찰이 우리 쪽에 신고를 했어요. "투신한 사람이 있으니 와 달라"는 거였습니다. 나갈 때 벌써 찝찝했죠. 투신이라니까요. 그래도 살았을 경우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면서 갔어요. '도착해서 맥박이 있으면 부목 해주고, 경추 고정보호대, 척추 보호대 하고 어떻게 해야겠다' 이런 계획을 그려놓는 거예요. 맥박이 없으면 바로 CPR(심폐소생술) 하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동했죠. 구급차에서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가고 있었어요. 뒤에 타고 있었는데 뒤를 바라보면서 가고 있었어요. 그러다 뒤를 돌면서 "도착했냐"라고 물었는데 운전석 너머로 바닥에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거예요. 그냥 얼굴이 종잇장 같았어요. 이미 머리 뒤편은 다 터져서 보도블럭으로 퍼진 상태였죠. 머리의 안면부만 남은 상태였기 때문에…. 눈이 일자로 쫙 찢어져 있었는데 갸우뚱하게 고개를 숙이고 나를 째려보는 느낌이 들었어요. 게다가 상체만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두 다리가 없는 장애인이었어요. 차에서 내려서 고개를 돌리고 안 보려 했어요. 너무 끔찍했거든요. 시트로 빨리 덮었어요. 냄새는 안 났어요. 나중에는 '두 다리 없는 장애인이 어떻게 뛰어내렸을까'란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요. 한동안은 정말 그 얼굴만 생각났어요. 다른 생각을 하려면 더 생각이 났었고. 지금도 간간히 생각이 납니다. 갑자기 잠들기 전에 생각나기도 하고…. 다른 운동을 하다가도 생각나고….


●배모 소방사(34·여)


-서울 ○○소방서 119안전센터
-2013년 4월 7일 오후 노량진역 선로에 투신한 학생 후송. 12월 5일 오후에는 아파트 1층 베란다에 목을 매 숨진 70대 할아버지 시신 수습.
-시신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고 자주 잠을 못 잠.
-2013년 12월 18일 오후 서울 ○○소방서 119안전센터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어떻게 소방관이 됐나.

"간호사 일을 5년 하다 구급 특채로 소방관을 하게 됐어요. 간호사를 하다보니까 시험을 칠 수 있는 자격이 되더라고요. 구급차를 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는데 어쩌다보니 소방관이 돼 있었어요. 병원에서는 끔찍한 장면까진 볼 기회가 없었는데 여기 오니 그런 장면들을 하나하나 다 봐야 하는데 쉽지 않았어요. 지금은 행정 업무를 보고 있는데 구급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어떤 출동이 힘들었는지.

"2012년 6월 '심장이 멈춘 것 같다'는 신고를 받고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으로 출동을 했었어요. 저를 포함해 3명이 출동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34살에 100㎏이 넘는 거구의 남성이었어요. 오전 2~3시까지 이 남성이 술을 먹고 잠들었는데 오전 5시에 숨을 안 쉬니까 가족이 신고를 한 거였어요. 주택이었는데 차에서 내려서 한참을 골목길 따라 들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나이가 젊은데 그렇게 돼서 마음이 너무 안 좋았어요. 신고가 너무 늦었던 거죠. CPR(심폐소생술)을 했는데도 소용없었어요. 남성은 창문도 없는 쪽방에 누워있었습니다. 한 방이 3~4평 됐을 거예요. 남자 혼자 누워있는데 거의 방이 가득 찼었거든요. 형편이 어려운 집이었던 것 같아요. 부인, 처제, 장인어른까지 4식구가 사는데 집이 작았습니다. 불을 키려고 했는데 방에 전등 하나 없었어요. 간이 들것으로 남성 2명이 들었는데 무거우니까 엄청 힘들어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이후 힘들었나.

"며칠 동안 꿈에 그 남자가 나타났어요. 한 3~4일은 나타났던 것 같아요. 심정지로 출동을 나간 게 처음이라 그러지 않았나 싶어요. 또 젊은 사람이었고 환경도 어렵다보니까 죄책감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다른 대원이 나갔다면 살리지 않았을까'하는 막연한 죄책감이 들었었거든요. 그 이후에는 잠은 잘 자긴 했는데 종종 떠올랐습니다. 그 사람 얼굴이 생각나고 젊은 사람이 죽었다는 얘기가 나오면 떠오르고 그랬어요. 사망사고 났을 때도 종종 그 누워있는 장면이 떠올랐고…. 하지만 그게 지금까지 저를 압박하거나 하진 않습니다."

―구급대원으로 일하면 힘든 일을 많이 겪을 듯하다.

"지난해 4월 있었던 일입니다. '선로에 여성이 서있다'는 신고가 들어왔었어요. 출동하고 5분도 안 돼서 현장에 도착했는데 5년은 걸린 것 같아요. 심장이 두근거렸어요. 20대 초반 여성이 선로에 서있다니까. 보통 출동할 때는 긍정적인 것 보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니까요. 외상 장비 챙기고, 심정지 장비도 챙겼었죠. 이제 지혈할 것, 붕대, 거즈, 척추보호대, 혈압측정 도구 이런 것들을 챙겼는데 챙기면서도 걱정을 많이 했어요. 응급상황이니까. 제가 조치를 잘못 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는 거니까요. 현장에서 조치를 잘 해야 하고 시민들도 보고 있으니까 걱정이 많이 됐었죠. 원래 호흡이 없다거나 심정지, 이런 내용의 신고를 듣고 나갈 땐 엄청 긴장이 되거든요."

―상황이 급박했을 것 같다.

"출동할 때 보통 신고자와 통화하면서 그땐 뭐라고 통화했는지 기억조차 잘 나질 않아요. 장비 챙기고 팀원들하고 얘기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대충 역무원이 "기차에 치인 것 같으니 빨리 와라"라고 했던 것 같아요. 도착했을 때 이미 선로에 쓰러진 여성을 구조대가 플랫폼 위로 옮겨놨었어요. 얼굴 앞쪽이 부딪힌 것처럼 보였습니다. 의식이 있나 없나 불러도 보고, 흔들어 보고 그랬어요. 근데 의식이 없더라고요. 호흡이 있는지, 맥박이 있는지 봤는데 맥박은 있었어요. 얼굴에 출혈이 있긴 했는데 많이 있진 않았습니다. 척추보호대랑 경추보호대 하고 이송했어요.

그 이후로 노량진 하면 이 학생이 생각이 납니다. '아 그때 그랬었는데' 생각을 하곤 하죠. 노량진에서 복통을 호소하거나 어지럽다거나 이런 신고가 꽤 들어와요. 근데 그럴 때마다 이 학생이 많이 생각나거든요."

―자살 신고가 꽤 많다고 들었다. 어떤 상황에 나가봤는지.

"12월 5일 밤이었어요. 야간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오후 9시에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아파트 난간에 누가 대롱대롱 매달려있다'는 신고였어요. 심장이 두근거리고 떨리고 몸에서 열이 났어요. 걱정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그랬거든요. 구급차 타고 아파트로 갔는데 1층 베란다에 70대 할아버지가 목을 매고 있었어요. 베란다 바깥쪽이라 사람들도 봤을 겁니다. 거기가 1층도 반 층 올라간 높이라 화단이랑 2m 정도 떠 있었거든요. 할머니랑 둘이 사는 것 같았어요. 할아버지는 넥타이를 베란다 봉에 묶고 뛰어내린 것 같아요. 바깥에서 경비원이 밀어 올리고 안에서 우리는 할아버지를 끌어 올렸어요. 할머니가 '조용조용 하게 해달라'라고 부탁해서 소리 지르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조용히 신속하게만 하려고 했었죠. 혀를 내놓거나 눈을 뜨고 있진 않았어요. 표정은 눈을 감고 있었고 피가 안 통해서 그런지 창백했습니다. 넥타이를 풀기보다 심폐소생술부터 하느라 목맨 자국도 못 봤어요. 셔츠랑 스웨터에 바지를 입고 계셨는데 가위로 옷을 자르고 심장을 압박했어요. CPR(심폐소생술)을 계속 하면서 이송했어요. 결국 돌아가셨지만. 암하고 우울증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후에 일상에 변화가 있었나.

"며칠동안 잠을 못 잤어요. 그 장면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를 반복했거든요. 이후에 계속 생각나진 않았지만 비슷한 사고를 뉴스에서 보면 그 장면이 떠올랐어요. 비슷한 출동 나갔을 때 떠오르기도 하고 그랬어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요즘은 어떤지.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트라우마가 있거나 하진 않아요. 그런 출동을 하면 직원들하고 대화하고 털어버리려고 해요. 운동을 하거나 책을 보기도 해요. 자살 신고가 정말 많아요. 근데 그 사람들도 결국 정신과에 용기를 내서 못 간 거잖아요. 소방관도 힘들면 용기를 내서 이야길 해야 해요. 남자들이 속내를 더 못 꺼내 놓는 편이니까 오히려 더 힘들 것 같기도 하네요."


●김모 소방위(52)


-대전 ○○소방서 119안전센터
-2000년 9월경 아파트에서 투신자살한 시신 잔해를 수습하는 등 반복적으로 자살 및 사고사 현장 목격.
-대인기피증, 불안함, 분노 등 경험. 3년 동안 정신과 진료 받음.
-2013년 12월 22일 오후 대전의 한 식당에서 인터뷰.

▽일문일답


―소방관 경력이 20년이 넘으셨다.

"원래는 세계여행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는데 집이 워낙 가난했고 배고픈 시절이라 뭐라도 해야 했어요. 그러다 어떻게 소방관이 되게 됐는데 구급대가 창설되기 전에는 거의 막내들이 여기 저기 (부서를)가리지 않고 다녔거든요. 그 시절엔 병원에 부탁해서 간신히 거즈나 붕대도 얻어 쓰던 시절이었어요. 상사들이 두발 검사도 하던 시기였어요. 출동 나가면 조치를 하고 그러기 보단 병원으로 싣고 가는 게 일이었던 때였고요. 거의 구급차에서 20년 생활했다고 보면 됩니다."

―기억에 남는 출동이 있나.

"1991년 11월 깊은 가을이었어요. 오후 11시에 '사람이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받고 나갔었죠. 술에 만취한 남자가 공사장에서 술을 먹고 쓰러져 있던 거예요. 넓은 대지였는데 야적장이었던 것 같아요. 거기 남자가 쓰러져 있더라고요. 일단 당시에는 구급처치하고 그런 시스템이나 장비가 없을 때였으니까 병원으로 바로 싣고 갔어요. 병원에선 옷을 가위로 자르고 심폐소생술을 계속 하고 있었고. 저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 부인에게 연락을 했었죠. 부인이 병원으로 왔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일단 보호자가 왔으니까 안심이 됐어요. 인계를 했으니까요. 그렇게 안도감을 가지고 뒤를 돌았는데 여자 표정이…. 입고리가 올라가 있는 거예요. 소름끼치고 닭살이 돋았어요. 그 살며시 웃고 있는 표정이 잊혀지질 않더라고요. 그때부터 몇 달 간 여성에 대한 혐오감이 생겼었어요. 일반화를 해버린 거죠. 증오심이 차올라서 '어떻게 그럴 수 있지'란 생각이 든 겁니다. 표정을 봤을 땐 화나기보단 무서웠어요. 사무실에 들어가면서도 화가 가라앉질 않았죠. 한 5개월 걸렸어요. 여성 대인 기피증이 해소되는 데. 사람을 만나면서 잊혀지고 모든 여자가 그런 건 아니라는 것을 깨우친 겁니다."

―끔찍한 현장도 많이 봤겠다.

"2000년 초반 9월쯤이었어요. 새벽에 '누가 뛰어 내렸다'고 신고가 들어온 거예요. 그 때 출동을 갔었는데 남성 시체가 아파트 그 경비실 위 난간에 엎어져 있었어요. 피가 낭자해 있었고. 근데 현장에 갔을 때 아파트 입구 근처에서 '귤껍질'이 있길래 저도 모르게 그냥 주웠죠. 현장에 나와 있는 경찰한텐 "누가 아무데나 귤껍질을 버렸네요 나참"이라고 했어요. 근데 "그걸 주우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큰소릴 내는 거예요. 머리가 터져서 껍질이 튄 거였어요. 밤이어서 몰랐죠. 이런 일들이 꽤 많았어요. 그날 돌아가서 사무실에서 경험했던 걸 미친 듯이 흥분해서 이야길 했습니다. 동료들은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나 여유가 또 없으니까 못 들어주고. 그러니까 기분이 파도를 타는 겁니다. '아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란 생각이 계속 들고요. 자기 스스로 고립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한 10년 전부턴 사체를 보면 무섭거나 그래야 하는데 어느 순간부턴가 '부럽다' '저 사람은 편하겠지'란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예민해지고 거칠어졌어요. 특히 술을 많이 마셨습니다. 쉬는 날에는 소주 2병, 맥주 1000cc 먹고 그랬어요. 얘기를 아무도 안 들어주니까."

―성격이 내성적이신지.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에요. 안그래도 내성적인데 이런 일(사체를 본다거나 힘든 일)을 수차례 겪으면서 대인기피증이 생겼죠. 사람들을 만나는 게 꺼려지기 시작했고요. 만나자고 해도 안 나갔어요. 괴로운 이야기를 들어줄 것 같지도 않고 말하기도 싫었죠."

―그때 어떤 마음이었나.

"항상 불안했어요. 일이 연속이 되니까 힘들었고. 그날 있었던 현장이 계속 생각이 났어요. 잠을 못 자서 한 시간 마다 깼죠. 꿈은 전부 쫓기는 꿈이었어요. 내 손에 칼이 쥐어지고 누군가 손에도 칼이 쥐어져 있고, 서로 싸우는 꿈을 꿨어요. 몇 년 간을 이렇게 살았어요.

분노감도 점점 차올랐어요. 다른 사람이 잔소리를 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속으로 나도 모르게 '가만 안 둔다. 저 새끼 내가 어떻게 해야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사소한 잔소리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올랐고요. 얼굴이 빨게 지면서 분노가 조절이 안 됐어요. 혼자 화를 내거나 소리를 치게 되고요. 6개월 전 쯤엔 도저히 못 참고 '분노를 참기 힘들다'라고 아는 고참한테 이야기도 했어요.

말 수도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냥 세상에 혼자 있는 느낌이 들었어요. 술을 자주 마시니까 세수해도 술 냄새가 나고, 얼굴도 항상 벌겋고 부어있는 상태고 그렇게 출동을 나갔던 거예요. '오늘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렵고 초조해하며 일을 하러 갔어요."

―힘들 때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설명해줄 수 있나.

"하루 종일 절망감에 쌓여 있었어요. 무언가 나쁜 기운이 나를 감싸고 있는 느낌이랄까. 일이 힘든데 그만두면 밥은 또 못 벌어먹을 것 같고. 갈등이 계속 있는 겁니다. 당시엔 그게 고립인 줄도 몰랐는데 그게 고립이더라고요. 혼자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샘도 말랐어요. 일을 하다보니까 누적이 된 것 같습니다. 나이 들면서 체력도 떨어지고 그런데도 출동 나가면 힘들고. 그게 나이 먹으면 좀 편해져야 하는데 승진을 못해서 더 어려워진 것 같기도 해요.

3년 전에 치료를 받기 시작했는데 그때도 치료를 받을까 말까 엄청 망설였습니다. 2009년에 대전 본부에서 정신건강 일환으로 심리검사를 했는데 고위험군이라고 결과가 나왔었죠. 거기 결과에 '가급적 입원치료를 고려한다'라고 돼 있었어요. 그 공문 보자마자 짜증나서 욕부터 했어요. 아프다는 걸 인지 못 한 상태였으니까요. 창피하고 그랬던 거죠. 근데 견디질 못하겠더라고요. 그 울컥하고 가슴이 답답한 것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결국 병원에 갔어요. 처음에 병원에 갔을 때도 고생 많이 했습니다. 설문을 시켰는데 짜증이 막 나는 거예요. 그래도 '힘들다'고 털어놨었어요. 효과가 있는 줄도 모르고 그냥 '노느니 가보자'란 마음으로 갔었던 겁니다. 아직까지 '고름이 짜지지는 않고 더 덮여지는 기분'이 들긴 하는데 약을 타고나서 잠을 잘 자니까 일단 다니고 있어요. 한 달에 한 번 갑니다. 아직 속내를 다 털어놓진 못한 것 같아요."

―본인은 어떤 소방관인가.

"'저는 실패한 소방관입니다.' 지금까지 쌓인 게 너무 커요. 다시 선택하라면 절대 소방관은 안 할 겁니다. 약삭빠른 사람은 다른 부서를 가든 어떻게 해서든 힘든 걸 피하는데 제가 아둔해서 계속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닙니다. 자신감이 없거든요. 한참 힘들 땐 헛것도 보였어요. 무언가 멀리서 뿌옇게 뭔가가 보였다가 사라지고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소방관들 처우가 너무 안 좋습니다. 단순음주 신고는 정말 구별해줘야 하는데. 일단 쓰러져있으면 무조건 우리부터 부르는 거예요."

―요즘은 상태가 어떤지.

"지금은 짜증내거나 화내는 게 조금 덜 해졌어요. 느긋해지기도 했고요. 약을 먹고 좀 나아진 듯 합니다. 주변에도 힘든 일이 있으면 꼭 상담 받으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김성모 기자 mo@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